# 균열 (裂)
**1화**
밤이 깊어질수록 17층 아파트 804호는 기괴한 생물처럼 숨 쉬었다. 김민준은 노트북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귓가에 맴도는 저 긁히는 소리, 멀리서 울리는 듯한 불규칙한 진동 때문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또 시작이었다.
“젠장….”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그가 눈을 비볐다. 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아파트에 이사 온 지 한 달, 딱 3주 전, ‘그것’을 가동한 날부터였다. 이상 현상은 처음엔 사소했다. 현관문이 저절로 열린다거나, 욕실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거나. 하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그 강도는 점차 집요하고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오늘은 좀 조용하려나.’
헛된 기대를 품었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쿵’ 하는 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책장 위, 낡은 세계사 책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꽂혀 있던 책이었다.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두려움보다 짜증이 먼저 치밀었다.
“이제 하다 하다 서재까지 진출하시겠다고?”
혼잣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려 책장을 노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보이는’ 아무것도 없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째깍, 째깍. 그 소리마저도 신경을 긁는 듯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민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무시하고 있을 단계는 아니었다. 그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자 김치찌개 냄새가 확 풍겨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냉장고 안이 아니라, 그 옆에 세워진 거대한 금속 랙에 고정되었다. 온갖 공구와 부품들로 가득 찬 랙. 그 맨 위 칸에는 큼지막한 은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측면에는 ‘코어 융합 유닛 01’이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의 원흉. ‘에이온(Aeon)’의 심장이자, 불완전한 힘의 원천.
민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자에 손을 뻗었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상자 안에서 뭔가가 희미하게 발광하는 것을 보았다. 붉고 푸른빛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사라졌다. 마치 내면의 에너지가 넘쳐흐르려는 듯.
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젠장, 봉인조차 완벽하지 않은 건가?”
봉인했다고 믿었던 코어에서 미약하게나마 에너지 방출이 감지된다는 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이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들이 모두 코어의 불완전한 에너지 장 때문이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였다.
그가 상자를 자세히 살펴보려 허리를 숙이는 순간, 주방 식탁 위 유리컵이 갑자기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산산조각이 났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온 사방으로 튀었다.
“크윽!”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공중에 매달린 듯 서 있는 컵을 본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보았다. 검은 실루엣이 컵을 쥐고 있다가, 손목을 비틀어 바닥에 던져버리는 것을. 환영인가? 아니면…?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건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무심코 주방 창밖을 내다봤다. 불빛으로 수놓인 거대한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창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각자의 삶의 조각들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아찔하게 이어져 있었다. 이 거대한 도시의 한 조각, 그의 아파트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때였다. 귓가에 차가운 속삭임이 스쳤다.
*“…탐내지 마…”*
섬뜩한 목소리였다. 성별조차 불분명한, 갈라지고 비틀린 음성. 바로 옆에서 속삭인 듯 생생했다. 민준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몸을 돌려 거실로 향했다. 거실의 TV는 꺼져 있었지만, 화면이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그리고 희미하게, TV 화면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사람의 형태를 닮은, 하지만 너무나도 일그러지고 왜곡된 형체.
“누구야…!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민준은 절규하듯 외쳤다.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의 랩톱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엄청난 속도로 벽에 내던져졌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랩톱은 박살 났고, 액정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이젠 도저히 이성을 붙잡을 수 없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명백한 위협이자 공격이었다. 그리고 모든 증거는 단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민준은 주저 없이 복도를 가로질러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문을 열었다. 그곳은 특수 방음, 방진, 그리고 전자파 차단 설비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소위 ‘밀실’이라 불리는 공간이었다. 그의 침실 옆에 있었지만, 그 용도는 완전히 달랐다.
문이 열리자, 육중한 금속의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확 풍겨 나왔다. 방 안에는 거대한 검은색 천이 덮인 물체가 놓여 있었다. 어렴풋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그 규모는 훨씬 압도적이었다. 높이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의 형상.
바로, 그가 밤낮없이 매달려 개발하고 있던 최첨단 전투 시스템, ‘에이온’의 불완전한 껍데기였다.
평소라면 이 방은 완벽하게 밀폐되어 외부의 어떤 간섭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방 안은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듯 혼란스러웠다. 정밀 장비들이 놓여 있던 선반은 기울어져 있었고, 벽에 걸려 있던 회로도 몇 장은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차폐막에서 미약하게 파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폐막이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민준은 공포에 질려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거대한 천 아래 숨겨진 에이온의 실루엣을 향했다. 검은 천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듯했다.
천천히, 너무나도 섬뜩하게, 검은 천의 한 귀퉁이가 스르륵 들려 올라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천을 걷어 올리는 것처럼.
그 아래 드러난 것은 에이온의 거대한 어깨 부분이었다. 무광택 검은색 합금으로 만들어진 장갑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위압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어깨 장갑 중앙에 박힌, 본래는 꺼져 있어야 할 센서 아이에서…
느릿하게, 붉은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에이온이… 반응하고 있어?’
뇌리를 스치는 공포스러운 깨달음. 에이온은 전원이 완전히 꺼져 있었고, 내부 코어는 봉인되어 있었다. 최소한의 전력조차 공급되지 않도록 설계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그 죽은 강철의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속삭임이 민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마치 여러 명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혼란스러운 울림.
*“…우리는… 갈망한다… 힘을…”*
*“…저 안에… 갇힌… 영혼을…”*
민준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영혼? 에이온은 영혼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기술의 결정체이자 살육 병기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들은 마치 에이온 안에 무언가가, 어떤 ‘존재’가 갇혀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에이온의 어깨 부분에 드러난 금속 장갑 틈새에서, 푸른빛의 정전기가 번쩍였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암흑 속에서 오직 에이온의 붉은 센서 아이만이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기계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정적을 찢었다.
그리고 이어진 건, 차가운 강철이 바닥을 긁는 듯한, 끔찍하게 느릿한 소리였다.
*크르르… 륵…*
검은 천이, 이제는 에이온의 거대한 팔 전체를 드러내며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민준은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그 순간, 방 전체를 감싸던 차폐막이 마침내 완전히 불타버리듯 검게 그을리며 박살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방 안의 공기는 마치 거대한 압력에 짓눌린 듯 무겁게 변했다.
그 암흑 속에서, 에이온의 붉은 센서 아이는 민준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처럼, 그의 영혼을 꿰뚫어보는 듯한 섬뜩한 시선.
그때였다. 붉은 빛을 뿜던 에이온의 센서 아이 옆에서, 새로운 빛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푸르스름하고, 마치 전기 아크가 튀는 듯한 섬뜩한 빛.
그것은 에이온의 또 다른 눈이었다. 그리고 그 푸른빛 속에서, 인간의 눈동자를 닮은 어떤 형상이 일그러지며 꿈틀거렸다.
민준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깨달음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다.
폴터가이스트는 단순한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에이온의 주변을 맴도는 그림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에이온 안에 있었다.
아니, 에이온이 ‘그것’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었다.
*“…환영한다… 우리의 육신…”*
낮게 으르렁거리는 기계음과, 수많은 목소리가 뒤섞인 속삭임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민준은 넋이 나간 채 에이온을 바라봤다. 거대한 강철의 골렘이, 이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정체불명의 존재가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거대한 괴물이 깨어나는, 봉인된 무덤이 되어 버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