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어실의 냉기 아래, 그의 손가락이 고밀도 광섬유 케이블을 훑었다. 기계적인 윙윙거림이 귓가에 끈질기게 매달렸지만, 강하준은 그 소음 속에서 자신만의 고독한 박동을 느꼈다. 눈앞의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수백만 개의 데이터 스트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모두 이준혁, 아니, 이제는 크로노스 그룹의 총수인 이준혁의 손아귀에 쥐어진 정보의 파편들이었다.
“젠장… 이 정도로 방어막을 칠 줄이야.”
하준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지난 3년간, 그는 그림자 속에서 살았다. 한때는 함께 꿈을 꾸었던 이준혁의 칼날이 등에 박힌 순간부터, 그의 모든 시간은 오직 이 복수를 위해 존재했다. 그들은 함께 ‘아르카디아’를 건설하려 했다.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궁극의 인공지능 프로젝트. 그러나 준혁은 아르카디아의 핵심 코드를 훔쳐 자신만의 제국을 세웠고, 하준은 그 잔해 속에서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이제 그는 그 잿더미를 뚫고 나와, 불꽃을 들고 돌아왔다.
‘크로노스 제1 데이터 센터, 지하 7층. 준혁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서버 팜.’
그의 뇌리에 각인된 정보가 마치 시스템 로그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준혁이 과거 자신과 함께 개발했던 핵심 기술의 원본 데이터, 그리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모든 불법적인 거래와 음모의 증거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그의 현재 목표는 간단했다. 아르카디아의 진짜 설계도를 찾아내는 것. 그것만이 준혁의 심장에 칼을 꽂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프로토콜 V-3 활성화.”
하준이 나직이 읊조리자, 그의 팔목에 착용된 초소형 디바이스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시야에 투영된 인터페이스가 빠르게 분석 데이터를 뿌려댔다. 벽면에 부착된 보안 터미널의 암호화 키를 파훼하기 위해 미리 심어둔 바이러스가 맹렬히 작동하는 중이었다.
[경고: 외부 침입 감지. 제1구역 보안 프로토콜 최대치.]
터미널에서 기계음이 울리며 붉은 경고등이 번뜩였다. 하준은 침착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준혁이 자신의 기술로 구축한 보안 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의 뿌리가 결국 하준의 손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준혁은 간과했다.
‘네가 나에게서 훔쳐 간 모든 것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게 될 거야.’
하준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한때는 둘이서만 알던 백도어 코드, 아르카디아 개발 초기 단계에 심어두었던 흔적들이 그의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시스템은 일시적인 혼란에 빠졌고, 그 틈을 타 하준은 깊숙이 침투했다.
[보안 프로토콜 재설정 중. 우회 경로 탐색 완료.]
[데이터 스트림 연결. 목표 파일 ‘아르카디아_코어_원본.arc’ 식별 중…]
잠시 후, 그의 스크린에 낯익은 파일명이 떴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3년간, 피와 땀으로 얼룩진 기다림의 결실이 눈앞에 있었다. 파일을 다운로드하기 위해 커서를 옮기려는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다, 강하준.”
하준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뱀처럼 서늘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제어실 입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잘 재단된 크로노스 그룹의 수석 연구원 제복을 입은 남자. 그의 얼굴은 예전과 다름없이 냉정했지만, 눈빛만은 이글거리는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한태성.”
하준은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성은 한때 그와 준혁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아르카디아 프로젝트의 초석을 함께 다졌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준혁이 그를 배신했을 때, 가장 먼저 준혁의 편에 선 자이기도 했다.
태성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손에는 은빛 섬광을 내뿜는 소형 플라스마 라이플이 들려 있었다. 총구는 정확히 하준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네가 아직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준혁이 형도 널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처리? 그게 네들이 나에게 한 짓에 대한 변명인가?” 하준의 목소리에도 싸늘한 비웃음이 섞였다. “아르카디아는 모두를 위한 꿈이었어. 그런데 너희는 그걸 훔쳐서 권력을 탐했지. 수많은 사람의 미래를 담보로.”
“순진한 소리 집어치워.” 태성이 비웃듯 말했다. “꿈? 강하준, 현실을 봐. 세상은 언제나 힘있는 자의 것이다. 준혁이 형은 그걸 가장 먼저 깨달았을 뿐이고. 너는… 너무 이상주의적이었어.”
태성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하준을 한 번도 친구로 생각해본 적 없는 것처럼. 3년 전 그날, 준혁이 하준을 나락으로 밀어 넣었을 때, 태성 또한 그 뒤에서 웃고 있었다. 하준의 눈에 그때의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 대가, 반드시 치르게 될 거다.”
하준은 냉정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의 시선은 태성의 손에 들린 플라스마 라이플, 그리고 그 뒤편의 서버 랙을 번갈아 응시했다. 아르카디아의 진짜 코드는 아직 다운로드되지 않았다.
“대가?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여기는 크로노스의 심장부다. 네가 감히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야.”
태성의 플라스마 라이플에서 푸른빛이 일렁였다. 발사 직전의 신호였다. 제어실의 문은 자동으로 잠겼고, 공기 중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었다.
‘좋아, 태성. 네가 그토록 원하는 현실을 보여주지.’
하준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춤에 감춰둔 나이프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플라스마 라이플의 푸른빛이 최대치로 치솟는 순간, 하준의 몸이 그림자처럼 쏘아져 나갔다.
총성이 울리기 전, 제어실 안에는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