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핏물이라도 들이부은 듯 불그스름했다. 무너진 빌딩의 뼈대 사이로 스며드는 삭막한 바람은 먼지와 썩은 내를 실어 날랐다. 강우는 낡은 소총의 개머리판을 어깨에 단단히 붙인 채, 잔해로 뒤덮인 골목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세 명의 그림자 역시 숨소리조차 죽이며 발소리를 감췄다.
“좌측 건물 3층, 조심해. 거미줄이야.”
강우의 귓속말에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미줄’은 이 폐허 도시에 널린 망자들의 둥지를 일컫는 은어였다. 주로 높고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인기척이 들리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놈들.
“지연, 후방 시야 확보. 민준, 선두에서 장애물 제거.”
강우의 지시에 따라 날카로운 눈빛의 지연이 주변을 경계했고, 건장한 체격의 민준이 낡은 철근을 조심스럽게 걷어내며 길을 텄다. 그들의 목적지는 붕괴된 제국 수도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구식 보급창고였다. 제국 병사들이 대부분의 물자를 긁어갔지만, 미처 손대지 못한 구석진 창고에는 아직 쓸 만한 보급품이 남아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은 그들에게는 죽음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희망이었다.
갑자기 민준의 발이 멈췄다. 그는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켰다. 흙먼지 위에 선명하게 찍힌 군화 자국. 제국의 문장이 희미하게 새겨진, 아직 마르지 않은 흙.
“젠장, 제국 놈들이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민준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섞였다.
“아니, 오히려 우리보다 먼저 침투한 건지, 아니면….” 강우는 말을 흐렸다. 제국 병사들은 망자들을 방패삼아 최전선에 평민들을 내세우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여기에도 그런 꼼수를 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목표는 보급창고다. 만약 제국 병사들과 마주치면, 교전은 최소화하고 우회해서 빠져나온다. 알겠나?”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허가 된 거리를 한참 더 나아가자, 목적지인 보급창고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철골 구조물은 세월의 풍파와 대재앙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창문은 깨져 있었고, 녹슨 셔터 문은 반쯤 열린 채 거친 내부를 드러냈다.
“너무 조용하잖아.” 지연이 속삭였다.
보급창고는 항상 망자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굶주린 시체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소리, 서로를 긁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라도 들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죽은 듯 고요했다. 그 정적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강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희망은 고통을 상쇄할 만큼 강력한 유혹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앞으로 나아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셋은 각자의 소총을 겨눈 채 조심스럽게 셔터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내부는 예상대로 어두컴컴했다. 먼지 낀 공기가 코를 찔렀고, 희미한 빛줄기가 천장의 구멍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바닥을 비췄다. 텅 빈 선반과 뒤집힌 파레트들이 창고의 황량함을 더했다.
“저기 봐!” 민준이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낡은 나무 상자 더미 뒤에, 제국의 보급품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아직 봉인도 뜯지 않은 새것들. 눈앞의 광경에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강우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이상하다… 너무 쉽게 발견했어.”
강우가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 순간, 천장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망자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이어진 연쇄 반응처럼, 사방의 어둠 속에서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망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천장, 벽, 바닥 어디에든 숨어 있었던 것처럼 일제히 강우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망자 매복이다! 제국 놈들이 놈들을 여기에 가둬두고 미끼로 썼어!” 지연이 외쳤다. 그녀의 소총에서 불을 뿜으며 가장 가까이 달려드는 망자의 머리를 정확히 맞췄다.
민준도 소총을 난사하며 강우를 엄호했다. “너무 많아요! 이건 함정이에요!”
강우는 망자들의 파도 속에서 제국 병사들의 군화 자국을 다시 떠올렸다. 그들은 망자를 미끼로 쓰고, 그 미끼에 걸려든 평민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망자들은 일종의 경보 장치이자, 제국 군대가 손쉽게 처리할 먹잇감을 몰아넣는 사냥개였던 셈이다.
“젠장! 일단 빠져나가야 해! 민준, 후퇴 경로 확보! 지연, 엄호 사격!”
강우는 외치며 망자들 사이를 헤집었다. 하지만 망자들의 숫자는 압도적이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시체 더미에 그들은 점점 포위당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창고의 가장 안쪽, 제국의 보급품이 쌓여 있던 상자 더미 뒤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피융-!’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강우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뭔가에 그가 움찔했다.
“제국 병사들이야!” 지연이 이를 갈았다.
망자들 뒤에서 제국의 병사들이 라이플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망자들을 직접적으로 쏘지는 않고, 강우 일행에게만 정확히 조준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망자들은 그들에게 방패나 다름없었다.
“개자식들! 이런 식으로 평민들을 사냥하다니!” 민준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강우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망자들의 물결이 그들을 삼키기 직전이었다. 그는 망자들이 달려드는 틈을 타서 보급품 상자 쪽으로 몸을 날렸다. 최소한 그들이 노린 보급품 중 일부라도 가져가야 했다.
“지연, 민준! 상자를 최대한 챙겨서 서쪽 출구로!”
강우는 망자들의 목을 잡고 발로 차 넘어뜨리며 간신히 보급품 상자 앞에 도달했다. 크고 튼튼한 전투용 배낭을 재빨리 펼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통조림과 구급약품을 쓸어 담았다. 제국 병사들의 총탄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망자들을 피해 몸을 웅크리고 있던 제국 병사 하나가 강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소총을 들고 있었지만, 정작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작은 장치에 무언가를 연결하고 있었다. 기이한 금속성 물체. 그리고 그 물체에 연결된 가느다란 선은 창고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강우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것은 단순한 함정이 아니었다.
그 순간, 제국 병사의 손에 들린 장치에서 번쩍이는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창고 가장 안쪽에서 섬뜩한 굉음과 함께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이 시작됐다.
“빌어먹을… 폭탄이다!” 강우가 절규했다. “전부 빠져나가!”
그러나 이미 늦었다.
창고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맹렬한 불길이 창고 전체를 집어삼키며, 쇠락한 건물마저 통째로 무너뜨릴 기세였다. 제국 병사들이 설치한 폭탄은 단순한 함정이 아니라, 평민들을 섬멸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거대한 파괴 공작이었던 것이다. 망자들조차 그 폭발의 희생양이 되었다.
강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려 배낭을 감쌌다. 그의 눈에, 폭발하는 화염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망자들이었다. 제국 병사들이 일부러 망자들을 보급창고 안으로 몰아넣고, 평민들이 들어오면 같이 폭살시키려던 것이다.
제국은 그저 멀리서 폭정을 일삼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의 모든 고통과 죽음이 자신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망자들조차 그들의 전쟁 도구에 불과했다.
“이 미친 개자식들…!”
강우는 분노에 휩싸였다. 이젠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이 싸움은 단순히 생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 거대한 제국의 악행을 증명하는 산증인이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 속에서, 강우는 자신의 소총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폭발의 충격파가 그를 뒤덮기 직전, 그는 결심했다. 이 제국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무너지는 것을 반드시 지켜볼 것이라고. 설령,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화염과 먼지, 그리고 무너지는 철골 잔해 속에서 강우의 시야는 점차 흐려졌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전례 없는 격렬한 분노와 함께 뛰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란의 불씨였다.
그리고 그 불씨는, 제국이 망자들의 시체로 쌓아 올린 이 폐허 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