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역사물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한때는 한강이 굽이치던 자리, 거대한 빌딩 숲이 하늘을 찌르던 도시의 심장이었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붉은 흙먼지 아래 잠겨버린 거대한 무덤과 같았다. 뜨거운 공기가 폐부를 찢는 듯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모래알이 목구멍을 긁는 것 같았다.

지아는 낡은 방진 마스크 위로 흐르는 땀을 거칠게 훔쳤다. 얇게 찢어진 장갑 사이로 드러난 손등은 거칠고 갈라져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희미하게 윤곽만 남은 건물 잔해들을 훑었다. 망원경으로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움직이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죽은 땅이었다.

“누나, 정말 여기 뭐가 있을까?”

뒤에서 들려오는 하준의 목소리는 꽤나 지쳐 있었다. 열두 살, 한창 자랄 나이였지만, 메마른 세상은 아이에게 충분한 영양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래보다 훨씬 왜소한 몸에 낡은 배낭을 멘 하준은 지아의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랐다.

“모른다. 하지만 찾아야 해. 우리 저장고의 정수 필터가 거의 다 닳았어.”

지아는 짧게 대답하며 녹슨 철근이 비죽 튀어나온 콘크리트 덩어리를 넘어섰다. 폐허가 된 건물의 가장 깊숙한 곳, 한때 ‘정보 보관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을 법한 건물이었다. 다른 곳보다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다. 어쩌면 전력 설비나 정수 장치 같은 중요 부품들이 보관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그녀를 이곳까지 이끌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는 부서진 서버 랙과 케이블 잔해들이 뒤엉켜 있었다. 지아는 손전등을 비춰가며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준은 그녀의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주변을 경계했다. 아이의 눈에는 두려움과 함께 익숙한 체념이 어려 있었다.

“조심해, 하준. 바닥 조각들 잘 보고.”

쿵, 쿵.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폐허의 심장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갑자기 하준이 숨을 들이켰다.

“누나, 저기!”

하준이 가리킨 곳은 부서진 벽 너머, 어둡고 깊은 틈새였다. 손전등 빛을 비춰보니, 그 안쪽으로 철제 계단이 희미하게 이어져 있었다. 어둠 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심연이었다.

“지하로 통하는 것 같아. 조심해야 해.”

지아는 망설임 없이 계단에 발을 디뎠다. 오래된 철제 계단은 삐걱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하중을 버텨냈다. 한 칸, 한 칸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습해졌다. 빛이 닿지 않는 깊은 곳,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시간이 길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내 가장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삼켰다. 녹슨 문이 부서진 채 열려 있는 안쪽에는, 수십 개의 거대한 물탱크와 복잡한 파이프라인이 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먼지에 뒤덮였지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대한 ‘정수 시스템’이 보였다. 오래된 공업용 정수 시설이었다.

“대박… 누나, 이거 진짜잖아! 물!” 하준이 흥분해서 외쳤다.

“조용히 해, 하준. 아직 몰라.”

지아의 눈은 정수 시스템의 제어판을 향했다. 먼지투성이였지만, 전원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리는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기계 옆에는 수많은 필터들이 상자 안에 쌓여 있었다. 새것처럼 보이는 필터들이었다.

“이게 작동만 한다면….”

그녀는 조심스럽게 제어판에 다가갔다. 전원이 들어왔지만, 시스템은 멈춰 있었다. 부팅을 시도하자, 낡은 모니터 화면에 익숙한 로고가 떴다.
[대한민국 수자원 공사 – 스마트 워터 시스템]
‘대소멸의 날’ 이후, 이런 문구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찬란했던 시절, 이 땅이 ‘기적의 나라’라 불리던 그때의 흔적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잿더미만 남았지만.

지아는 시스템을 재가동하기 위해 여러 명령어를 입력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시스템 복원’ 메시지가 뜨는 것을 확인했다.
“성공이야! 하준, 필터를 가져와!”

하준은 재빨리 달려가 필터 상자를 들고 왔다. 지아는 능숙하게 낡은 필터들을 제거하고 새것으로 교체했다. 기계는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물탱크에서 물이 공급되는 소리가 들리고, 몇 분 후, 가느다란 물줄기가 파이프 끝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맑고 투명한 물이었다.

하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물을 받아 마셨다. “누나! 진짜 물이야! 차갑고… 맛있어!”

지아는 하준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갑자기 정수 시스템 전체가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모니터 화면에는 경고 메시지가 깜빡였다.
[경고: 시스템 과부하. 침입 감지. 보안 프로토콜 가동.]

“젠장, 뭐야!”

그녀는 시스템을 멈추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머리 위에서 웅웅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거대한 드릴 소리였다. 누군가 천장을 뚫고 내려오고 있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지아는 총을 뽑아 들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천장의 콘크리트가 부서지면서 거대한 흙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그 사이로,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빛은 살기로 번득였다.

“찾았다, 정수 시스템.” 선두에 선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보너스로, 쓸만한 필터까지. 운이 좋군.”

“물러서. 이건 우리 거야.” 지아는 총을 겨누며 말했다.

남자는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 “폐허에 주인이 어디 있어?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지. 특히 귀한 물이라면 더더욱.”

그들의 수는 다섯 명이었다. 지아와 하준은 둘뿐이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지아는 하준의 손을 꽉 잡았다. 아이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준, 내가 신호를 주면 무조건 뛰어.” 지아는 아이에게 속삭였다. “뒤돌아보지 말고, 저기… 저 폐쇄된 문으로.”

“하지만 누나는…!”

“잔말 말고!”

남자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지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하준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소멸의 날’ 이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왔듯이.

“자, 그럼 게임을 시작해 볼까.” 선두 남자가 손짓하자, 다른 남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녹슨 칼날, 몽둥이, 그리고 저 멀리서 빛나는 총구까지.

지아는 하준에게 마지막으로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총을 힘껏 움켜쥐었다.

이곳은 더 이상 물이 솟는 희망의 오아시스가 아니었다. 오직 생존을 위한 피 튀기는 싸움만이 남은,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지아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일이 이런 싸움의 연속이라는 것을. 그리고 오늘 또한, 예외는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