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고독한 그림자
새벽의 첫 햇살이 깨진 유리창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먼지 낀 공기 속을 유영하는 빛줄기는 세상이 멸망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영롱했지만, 그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들은 너무도 달랐다. 김민준은 눅눅한 침낭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눈을 떴다. 묵직한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한 위장이 아침을 알렸다. 어제 먹은 마지막 통조림 콩조림이 벌써 다 소화된 모양이었다.
천장에서는 빗물이 스며들어 생긴 거뭇거뭇한 얼룩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한때 누군가의 안락한 보금자리였을 이 빌라의 꼭대기 층은 이제 그의 임시 거처였다. 놈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창문은 두꺼운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복도와 계단은 잔해물과 가구들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침은 고요했다. 새소리 대신 불어오는 바람 소리, 어딘가에서 삐걱거리는 금속음만이 이 세계의 유일한 자연의 소리였다.
“젠장, 또 배고프네.”
쉰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민준은 몸을 일으켰다. 삐걱거리는 관절마다 익숙한 통증이 스쳤다. 그는 옆에 놓인 배낭을 뒤적여 낡은 지도를 꺼냈다. 어제 밤새 살펴보고 또 살펴본 지도였다. 이제 이 도시에서 그가 탐사하지 않은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이미 놈들에게 점령당했거나, 다른 생존자들이 휩쓸고 간 빈 껍데기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지도의 한 모퉁이, 상업 지구 외곽에 위치한 작은 슈퍼마켓. 그는 그곳을 마지막 희망으로 점찍어 두었다. 너무 작아서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났거나, 아니면 너무 깊숙한 곳에 있어서 아무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민준에게는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손때 묻은 지도를 접어 넣고, 민준은 낡은 군용 조끼를 걸쳤다. 탄창 두 개와 작은 칼집이 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유일한 무기는 녹슬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도끼였다. 한때 소방서에서 쓰였을 법한 그 도끼는 수많은 놈들의 머리를 갈랐고, 그만큼 민준의 손에 익숙했다. 옆구리에 찬 물통에는 겨우 한 모금 남짓한 물이 출렁였다.
출발 전, 민준은 항상 하던 의식을 치렀다.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깊고 느린 심호흡을 세 번. 두려움을 쫓아내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그 생각에 붙잡히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목표, 슈퍼마켓, 그리고 그곳에 있을지 모를 한 조각의 음식만이 중요했다.
“자, 가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민준은 몸을 일으켰다. 낡은 작업화를 단단히 조여 매고, 배낭을 고쳐 멨다. 바리케이드를 조심스럽게 헤치고 복도로 나섰다. 텅 빈 복도는 그의 발소리를 메아리쳤다. 쿵, 쿵. 마치 망자가 걷는 소리처럼 묵직하게 울렸다. 계단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층마다 짙게 깔린 어둠은 또 다른 미지의 존재를 품고 있는 듯했다.
건물 밖으로 나서는 순간, 차가운 새벽 공기가 그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변함없이 절망적이었다. 부서진 자동차들이 도로 위에 흉물처럼 박혀 있었고, 건물들은 그을리거나 반쯤 무너진 채 잿빛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찢어진 현수막 조각들이 휘날리며 찰싹거리는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부패하고 있었다.
민준은 익숙하게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골목길을 따라 이동하며 주위를 끊임없이 살폈다. 그의 눈은 모든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저 멀리서 움직이는 희미한 그림자, 건물 잔해 사이에서 삐져나온 찢어진 옷자락,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놈들의 흔적.
그의 목적지인 슈퍼마켓은 예상보다 훨씬 깊숙한 곳에 있었다. 한때 번화했을 거리는 이제 완벽한 죽음의 공간이었다. 상점들의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 있었고, 내부에는 약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바닥, 널브러진 진열대, 그리고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역겨운 냄새.
“씨발.”
민준은 작은 욕설을 내뱉었다. 너무나 익숙한 그 냄새는 놈들이 가까이 있다는 신호였다. 그는 도끼를 고쳐 잡았다. 축축하게 땀이 배어나는 손바닥에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심장이 쿵, 쿵, 쿵.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간판이 반쯤 떨어져 나간 슈퍼마켓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동네 마트’. 낡은 글씨가 비웃듯이 흔들렸다. 입구는 나무판자로 대충 막혀 있었지만, 한쪽이 부서져 있었다. 누군가 이미 침입했다는 증거였다. 혹은… 놈들이 안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었다.
민준은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몸을 숨겼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은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빛났다. 주변을 살피고, 귀를 기울였다. 미세한 소리도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흐읍… 흐읍…’
슈퍼마켓 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불규칙하고 둔탁한, 그리고 쉰 숨소리. 한 마리였다. 혹은 두 마리. 그는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배고픔은 그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민준은 깊은 숨을 내쉬고는 빠르게 움직였다.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를 걷어차 부수고 안으로 진입했다. 내부의 공기는 바깥보다 훨씬 눅눅하고 퀴퀴했다. 부패한 음식물 냄새와 피 냄새, 그리고 놈들의 독특한 악취가 뒤섞여 그의 코를 강하게 찔렀다.
“크어어…”
어둠 속에서 놈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한때는 사람이었을 존재. 찢어진 옷과 썩어가는 피부,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진 팔이 민준을 향해 뻗어졌다. 놈은 민준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달려들었다. 느리지만 집요한 움직임.
민준은 침착하게 놈의 움직임을 읽었다. 도끼를 짧게 쥐고 옆으로 비켜서며 놈의 팔을 피했다. 놈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순간, 민준은 온 힘을 실어 도끼를 휘둘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끈적한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고, 놈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축 늘어진 팔다리가 경련하듯 움직이다 이내 멈췄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민준은 도끼날에 묻은 핏덩이를 진열대 모서리에 긁어 제거했다. 익숙한 과정이었다. 그는 이 짓을 수백 번도 넘게 해왔을 것이다. 아니, 수천 번인가? 이제는 셀 수도 없었다.
내부는 암울했다. 대부분의 진열대는 비어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병 조각과 찢어진 포장지들이 널려 있었다. 쥐들이 지나다닌 흔적도 보였다. 놈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재빨리 찾아야 했다. 민준은 끈질기게 매의 눈으로 모든 구석을 훑었다. 과자 코너, 음료 코너, 생필품 코너… 아무것도 없었다. 절망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냉동고였다. 전기가 끊긴 지 오래였지만,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그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낡은 냉동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역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안에는 곰팡이가 피어 버린 얼룩진 음식물들이 가득했다. 민준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역시나.
포기하려는 찰나, 냉동고 구석, 다른 음식물에 가려져 있던 작은 상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찌그러진 상자. 민준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상자를 꺼냈다. 상자 위에는 희미하게 ‘초콜릿 바’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낱개 포장된 초콜릿 바들이 겹겹이 들어 있었다. 꽤 오래되었는지 포장지는 눅눅했고, 초콜릿 색깔도 바래 있었지만, 분명히 먹을 수 있는 형태였다.
민준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떨리는 손으로 초콜릿 바 하나를 꺼내 들었다. 포장지를 뜯자 달콤한 초콜릿 향이 그의 코를 자극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맡아보지 못한 향기였다. 그는 초콜릿을 한입 베어 물었다. 눅눅하고 푸석했지만, 그 맛은 천상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달콤함이 그의 혀를 감싸고, 이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평범한 맛 하나에 그가 이토록 감격할 줄은 몰랐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한 조각의 초콜릿이 주는 생존의 의미. 그는 남은 초콜릿 바들을 조심스럽게 배낭에 넣었다. 보물처럼 귀하게 다루었다. 이것들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내일을 살아갈 힘이자, 절망 속에서 피어난 작은 희망이었다.
초콜릿 한 조각으로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민준은 물을 찾아 내부를 다시 샅샅이 뒤졌다. 진열대 구석, 먼지 쌓인 선반 뒤에서 플라스틱 생수병 몇 개를 발견했다. 반쯤 비어 있었지만, 썩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깨끗한 물의 맛은 초콜릿만큼이나 귀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이 죽음의 공간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도시는 여전히 놈들의 세상이었고, 그 자신은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고독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슈퍼마켓을 나서는 민준의 발걸음은 아까보다 조금 더 가벼웠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도끼를 든 손은 굳건했다. 먼동이 터오는 회색빛 하늘 아래, 그는 또 다른 내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는 다시 죽음의 고요가 내려앉았다. 언제까지 이 고독한 생존이 이어질까.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걸을 뿐이었다. 살기 위해서. 오늘도. 그리고 아마도, 내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