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밤은 언제나 찬란했다. 수많은 별들이 스크린처럼 펼쳐진 하늘 아래, 미나와 슬기는 수호자였다. ‘별빛 기사 미나’, 그리고 ‘달빛 여제 슬기’. 이름만으로도 가슴 벅찬 수식어였고, 우리는 그 이름에 걸맞은 빛을 뿜어내며 도시를 지켰다.
“미나! 왼쪽이야!”
슬기의 목소리는 늘 날카로웠고, 동시에 따뜻했다. 그녀의 지시대로 몸을 틀자, 촉수 괴물의 약점이 보였다. 빛의 검을 휘두르자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산산조각 났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슬기의 웃음은 달빛처럼 부드러웠다.
“오늘도 완벽했어, 슬기! 역시 우리 콤비가 최고라니까!”
나는 팔랑거리는 스커트를 정리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슬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너무 잘해주니까 그렇지. 미나, 너는 언제나 내 앞을 밝혀주는 별 같아.”
나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우리는 별빛이 쏟아지는 도시의 가장 높은 빌딩 옥상에 앉아, 내일의 평화를 꿈꾸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잊지 못할 밤이었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할 줄 알았다. 영원히 빛날 줄 알았다.
***
그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어둠의 군주’가 강림했다. 그가 발하는 어둠은 도시의 모든 빛을 삼키려 들었고, 우리는 필사적으로 맞섰다.
“미나! 방어막을 더 올려! 내가 틈을 만들게!”
슬기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나는 온몸의 마력을 끌어모아 도시 전체를 덮는 거대한 빛의 방어막을 쳤다. 투명한 황금빛 장막이 어둠의 공격을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혔지만, 슬기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그녀는 언제나 내 가장 든든한 방패였고, 가장 날카로운 창이었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야! 슬기, 준비됐지?”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외쳤다. 슬기의 힘이 필요했다. 어둠의 군주의 핵을 정확히 노릴 수 있는 환영과 집중 공격이.
“응, 미나. 물론이지.”
슬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분했다. 나는 그녀를 믿었기에, 잠시 방어막에 균열을 내며 내 모든 힘을 빛의 화살로 응축했다. 어둠의 군주가 움찔했다. 지금이다!
그 순간, 내 등 뒤에서 섬뜩한 냉기가 느껴졌다.
콰드드득!
내가 친 방어막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 내 몸을 꿰뚫는 날카로운 고통. 빛의 화살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커… 헉!”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 내가 본 것은 나의 방어막을 뚫고 내 심장을 겨눈 슬기의 달빛 검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섬뜩하게 미소 짓는 어둠의 군주.
“미나… 미안. 너는 항상 내 앞이었지. 이제… 내가 빛이 될 차례야.”
슬기의 얼굴은 낯설 만큼 차가웠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어둠의 군주가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번개가 방어막이 사라진 도시를 향해 쏟아졌다. 건물들이 무너지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나는 속절없이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내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내가 믿었던 모든 것도.
***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이었다.
마법소녀 변신 도구였던 별빛 콤팩트는 산산조각 나 있었다. 간신히 회복실에서 깨어났을 때, 나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 몸은 흉터투성이였고, 마음은 그보다 더 깊은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도시 전체가 어둠의 그림자에 갇혔다. 사람들은 절망에 잠겼고, 희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슬기는 어둠의 군주의 가장 충실한 수하가 되어, 나를 배신한 날보다 더 강한 힘으로 도시를 유린했다. ‘달빛 여제 슬기’는 이제 ‘칠흑의 달’이라 불리며 공포의 상징이 되었다.
“슬기… 네가 나를 부쉈다면, 나도 너를 부술 거야.”
나는 중얼거렸다. 빛이 사라진 내 안에서, 새로운 힘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수한 분노와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깨진 별빛 콤팩트는 더 이상 찬란한 빛을 내지 않았지만, 나의 증오를 담아 어두운 보라색으로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잠들지 않았다. 쉬지도 않았다. 뼈를 깎는 훈련 속에서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났다. 나의 빛은 어둠을 머금었고, 방어막은 파괴를 위한 족쇄가 되었다. 내 이름은 이제 더 이상 ‘별빛 기사 미나’가 아니었다.
나는 ‘복수의 별’ 미나.
어둠의 군주가 새롭게 조성한 제단, 우리가 처음으로 마법의 힘을 받았던 그 신성한 숲이 변질된 곳에 슬기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랜 침묵 끝에, 나는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
폐허가 된 숲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았다. 뿌리 뽑힌 나무들과 검게 물든 제단이 과거의 기억을 조롱하는 듯했다. 그 제단 위에,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의 슬기가 서 있었다. 그녀의 달빛 검은 이제 완전히 칠흑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눈은 오만함으로 가득했다.
“아, 미나. 아직도 살아있었어? 끈질기네.”
슬기는 나를 비웃었다. 마치 길가의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끈질기다고? 네 배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면에서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가 요동쳤다.
“그래, 배신이라. 너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슬기는 어깨를 으쓱였다. “항상 그랬잖아, 미나. 너는 언제나 빛났고, 나는 네 그림자에 불과했어! 사람들은 너를 찬양했지만, 내 노력은 아무도 몰라줬어! 나는 더 큰 힘을 원했을 뿐이야. 어둠의 군주님은 그걸 나에게 주셨고.”
그녀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질투와 열등감.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추악한 감정들이 그녀의 눈에 가득했다.
“그래서… 날 버리고, 이 도시를 팔아넘겼다는 거야?”
내 손에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는 더 이상 무른 빛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파괴할 준비가 된, 잔혹한 힘이었다.
“이해받을 생각 없어. 나는 너와 달리 강하니까.”
슬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달빛 검을 휘둘렀다. 칠흑빛 파동이 내게로 날아왔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검은 빛의 방패가 파동을 막아냈고, 나는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강하다고? 배신으로 얻은 힘으로? 우정을 짓밟은 대가로?”
내 빛의 검은 이제 보랏빛으로 번뜩였다. 우리는 칼과 칼을 부딪쳤다. 옛 친구가 아닌,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적이 되어.
슬기는 여전히 빨랐고, 환영 마법은 교묘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미나가 아니었다. 내 눈은 그녀의 모든 속임수를 꿰뚫어 보았다.
“사라져!”
슬기가 외치며 수십 개의 칠흑의 칼날을 날렸다. 나는 빛의 족쇄를 풀어, 그녀의 칼날을 묶고 튕겨냈다. 칼날은 슬기 자신을 향해 되돌아갔다.
“크윽!”
그녀의 어깨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피가 튀었다.
“이젠 네가 내 그림자가 될 차례야, 슬기.”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의 빛은 그녀의 어둠을 집어삼킬 듯 맹렬했다.
“아니야! 나는… 나는 너보다 강해!”
슬기는 마지막 힘을 짜내 거대한 달을 소환했다. 칠흑빛 달은 맹렬한 기운을 뿜어내며 나를 덮쳤다. 도시를 파괴했던 그 힘 그대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내 안의 모든 증오, 모든 분노, 모든 배신감을 끌어모았다. 나의 별빛 콤팩트가 폭발하듯 빛났다. 하지만 그 빛은 별빛이 아니었다. 무한한 심연의 어둠을 응축한 듯한, 복수의 빛이었다.
“네가 원했던 빛… 이제 느껴봐.”
나는 외쳤다. 내 모든 존재를 담아 거대한 보랏빛 낫을 휘둘렀다.
거대한 달과 보랏빛 낫이 충돌했다.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공간이 일그러졌다. 빛과 어둠이 뒤섞여 폭발했고, 슬기의 달은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낫은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슬기의 몸을 꿰뚫었다.
“미… 나… 아… 윽!”
슬기의 비명은 처절했다. 그녀의 눈에서 오만함은 사라지고, 공포와 함께 뒤늦은 후회가 스쳤다. 마법의 힘이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 내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힘없는 소녀가 되어 내 발밑에 쓰러졌다.
나는 낫을 거두었다. 슬기는 흙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아름다운 달빛 여제가 아니었다. 초라하고, 망가진, 평범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미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와서.
나는 그녀의 사과를 듣지 않았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네 미안하다는 말은… 이미 너무 늦었어.”
나는 차갑게 말했다. 내 마음속에는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복수는 끝났다. 그러나 내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슬기를 뒤로하고 폐허가 된 제단을 떠났다. 나의 별빛 콤팩트는 다시 조용해졌다. 빛도, 어둠도 아닌, 침묵하는 돌멩이처럼.
밤하늘에는 별들이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별들을 올려다보며 희망을 꿈꿀 수 없었다. 나는 복수를 이뤘지만, 나의 빛은 영원히 꺼져버린 듯했다.
텅 빈 가슴으로, 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영원한 그림자 속에서, 나는 홀로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