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대지가 숨 쉬는 소리는, 닳아빠진 강철 발굽이 잿빛 흙먼지를 짓밟는 소리였다. 고철의 몸체를 타고 흐르는 미약한 전력음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조종석 깊숙이 파묻힌 강휘는 거친 숨을 내쉬며 흐릿한 전면 스크린을 노려봤다. 폐허가 된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부서진 이빨처럼 하늘을 긁고 있었다.
“빌어먹을… 오늘은 아무것도 없군.”
강휘의 중얼거림은 고철의 내부 기계음과 섞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고철’. 그의 애기이자 유일한 생존 파트너였다. 닳아빠진 장갑판, 여기저기 덧대어진 녹슨 부품들. 세상이 멸망하고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버려지고, 주워지고, 다시 조립되기를 수없이 반복한 역전의 용사였다. 그 투박한 외형만큼이나 신뢰할 수 있는 존재였다.
고철은 거대한 팔다리를 움직여 무너진 고층 건물 잔해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치고 나아갔다. 발소리가 쿵, 쿵, 하고 황량한 거리에 울려 퍼졌다. 강휘의 시선은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연료가 될 만한 폐유, 장갑을 덧댈 강철 조각, 전력 충전용 코어… 무엇이든 좋았다. 이 잿빛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단 한 조각의 나사못도 소중했다.
그때였다. 찌릿, 하는 경고음이 조종석을 울렸다. 스크린 한쪽에 붉은 점이 깜빡였다.
“뭐지…?”
강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 구역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대형 약탈자 무리나 고도로 발전한 자율 병기가 출몰하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것은…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먼지구름 너머,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금속 덩어리였다. 팔인지 다리인지 모를 여러 개의 기계 촉수가 엉망으로 뒤섞여 땅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녹슨 관절이 삐걱거리는 비명을 질렀고, 군데군데 뜯겨나간 장갑 아래로 섬뜩한 붉은 광원이 깜빡였다. ‘망가진 파수꾼’. 과거 도시를 수호하던 거대 자율 병기의 잔해였다. 오염된 전파에 노출되어 제 기능을 상실하고, 오직 파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괴물.
“젠장, 이런 곳에서 튀어나오다니!”
강휘는 즉시 고철의 움직임을 멈추고 잔해 뒤로 몸을 숨겼다. 망가진 파수꾼은 느렸지만 압도적인 덩치를 자랑했다. 고철은 겨우 5미터 남짓한 소형 메카였다. 정면 대결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미 파수꾼은 고철의 존재를 눈치챈 듯, 붉은 광원을 번뜩이며 이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끼이이익-! 굉음을 내며 파수꾼의 거대한 팔이 무너진 건물 잔해를 휘둘렀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콘크리트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강휘는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 했다.
“전방 플라즈마 커터 출력 최대로! 고철, 움직여!”
강휘의 외침과 함께 고철의 관절에서 쇠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몸체가 순간적으로 튀어나가며 망가진 파수꾼의 시야를 벗어났다. 고철의 오른팔에 달린, 녹슨 외피로 겨우 감싸진 플라즈마 커터가 윙-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빛을 토해냈다.
치이이익-!
강렬한 플라즈마 빔이 파수꾼의 팔 관절을 노리고 쏘아졌다. 강휘는 파수꾼의 움직임이 둔하다는 것을 노렸다. 약점은 확실했다. 오래된 장갑은 이미 너덜너덜했고, 내부 동력선이 곳곳에 노출되어 있었다.
파수꾼은 엄청난 굉음을 내며 비틀거렸다. 플라즈마 커터가 만들어낸 깊은 상처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러나 고통을 느낄 리 없는 파수꾼은 더욱 격렬하게 주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엉망진창으로 뻗은 기계 촉수들이 고철을 향해 미친 듯이 뻗어왔다.
강휘는 고철을 조종해 아슬아슬하게 촉수들을 피했다. 몸체가 긁히고 찢어지는 소리가 조종석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 빌어먹을 고철덩어리! 어딜 긁는 거야!”
강휘는 소리쳤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파수꾼의 다음 동작을 읽고 있었다. 저 거대한 덩치가 내뿜는 광기와는 달리, 움직임의 패턴은 단순했다.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를 곡예하듯 질주하며 파수꾼의 후방으로 파고들었다.
파수꾼의 동력원은 보통 등이나 하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방어력이 가장 취약한 곳. 강휘는 고철의 왼팔에 달린 키네틱 가속기 포를 충전했다. 철컥, 철컥, 하며 압축되는 굉음이 고철의 작은 동체를 흔들었다.
파수꾼이 거대한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강휘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앙!
압축된 금속 덩어리가 엄청난 속도로 튕겨져 나갔다. 찢겨나간 강철 조각들이 파편처럼 날아올랐다. 키네틱 가속기 포탄은 정확히 파수꾼의 등짝, 가장 취약한 부위를 강타했다.
쿠구궁-! 파수꾼의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리더니,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엄청난 진동이 주변 폐허를 뒤흔들었다. 고철의 전면 스크린에는 먼지구름과 함께 파수꾼의 붉은 광원이 꺼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후우… 망할.”
강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고철의 조종간을 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승리했지만, 대가가 컸다.
고철의 경고등이 요란하게 깜빡였다. 우측 장갑판이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고, 유압 계통에서 뭔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플라즈마 커터의 에너지 잔량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휘는 고철을 조심스럽게 파수꾼의 시체 옆으로 이동시켰다. 이 거대한 고철덩어리는 그에게 귀한 자원 창고가 될 수 있었다. 망가진 장갑판을 뜯어내고, 동력선에서 구리선을 회수하고…
“이런 싸움은 한 번으로 족해.”
강휘는 조종석에서 내려 고철의 외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퀴퀴한 흙먼지와 불타는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훼손된 파수꾼의 시체는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휴대용 커터를 꺼내 파수꾼의 잔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부품들을 하나하나 분리하며 그의 눈은 예리하게 주변을 살폈다.
거대한 동력 코어를 향해 해체 작업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강휘의 손이 멈칫했다.
파수꾼의 뜯겨나간 장갑 깊숙한 곳에서, 섬광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일반적인 동력 코어나 전선 뭉치가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완벽하게 밀봉된 금속 상자였다. 수백 년의 풍파 속에서도 전혀 녹슬거나 훼손되지 않은 듯, 옅은 은빛 광택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 표면에는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대체 뭐지?”
강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본능이 속삭였다. 이것은 단순한 고철이 아니라고. 이 황폐한 세상의 생존자들이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어떤 종류의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폐허가 된 도시의 석양은 붉은 피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강휘는 상자를 든 채 고철의 조종석으로 다시 올라탔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오늘 밤은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지의 상자가 그의 손안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