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 아래, 무너져 내린 고층 빌딩들이 앙상한 뼈대처럼 솟아 있었다. 바람은 콘크리트 가루와 녹슨 철근의 비린내를 실어 날랐고,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거대한 폐허 속에서 처절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혁은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미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폐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검은 입 같았고, 그 입 안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 순간 죽음과 줄다리기를 하는 일이었다.
지난 사흘간,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괴이한 눈동자들이 가득한 밤거리를 헤쳐 오는 동안, 물통마저 잃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비상식량 한 조각과, 닳아빠진 나이프 하나뿐이었다. 선택지는 없었다. 죽거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살아남을 물건을 찾아내거나.
지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삐뚤게 기울어진 거대한 백화점 건물이었다. ‘스타리아 백화점’이라는 낡은 간판은 반쯤 부서져 땅에 박혀 있었고, 텅 비어버린 유리창들은 검은 눈동자처럼 뚫려 있었다. 저 안에는 분명 무언가 남아 있을 터였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물건, 혹은… 아무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 공포.
“젠장, 도박이군.”
낮게 중얼거린 지혁은 주머니에서 낡은 지도를 꺼내 펼쳤다. 종잇조각은 이미 여기저기 찢어지고 닳아 너덜너덜했다.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지하 식료품 매장’이라고 적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희미하게 인쇄된 동그라미 표시는 위험 지역이라는 경고였다. 이곳은 일전에 만났던 떠돌이 노인이 절대 가까이 가지 말라고 경고했던 곳이기도 했다. ‘어둠이 삼킨 곳’이라고 했던가.
철컥.
녹슨 철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은 한낮인데도 암흑에 가까웠다. 부서진 천장 사이로 겨우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왔지만, 그마저도 거대한 어둠을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때 화려했을 로비는 먼지와 잔해로 뒤덮여 있었다. 깨진 진열장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어떤 마네킹은 머리가 깨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기괴하게 꺾인 팔이 마치 누군가를 원망하는 듯 허공을 향해 뻗어 있었다.
지혁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소리만이 고요를 깨트렸다. 탁한 공기 속에서 비릿한 쇠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습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비록 낡았지만, 익숙한 무게는 언제나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에스컬레이터는 진작에 멈춰 녹슨 채였다. 지혁은 난간을 잡고 조심스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한 층, 한 층 내려갈수록 빛은 더욱 멀어졌고, 그림자는 깊어졌다. 이따금씩 천장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어둠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젠장, 여기 뭐라도 있어야 할 텐데.”
지혁은 허벅지에 찬 작은 랜턴을 꺼내 불을 밝혔다. 좁은 빛줄기가 주변을 더듬었다. 지하 1층, 식료품 코너. 그러나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식료품 매장이라기보다는, 시간이 멈춘 유적에 가까웠다. 진열대는 뒤집혀 있었고, 캔이나 병은 부서져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잔해와 뒤섞여 있었다.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이미 오래전에 약탈당하고 버려진 곳이었다.
좌절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여기까지 온 수고가 헛된 것이었나. 그는 폐허가 된 통조림 더미를 뒤적였다. 혹시라도, 단 하나라도 온전한 것이 있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스륵.
아주 희미한 소리. 마치 젖은 천이 바닥을 스치는 듯한 소리였다. 지혁은 즉시 몸을 굳혔다. 랜턴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폈다. 빛은 겨우 몇 미터 앞까지만 비출 뿐, 그 너머는 여전히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착각이었나? 피로가 극에 달한 탓일 수도 있었다.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통조림 더미를 뒤적였다.
스르르륵… 스륵.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확실했다.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지혁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이프를 꽉 쥐었다.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누구… 누구 없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 랜턴 불빛이 닿지 않는 저편에서,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림자는 벽에 드리워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환영인가… 아니.”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환영일 리 없었다. 이 폐허에서는 정신을 놓는 순간, 진짜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갑자기,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피부가 쭈뼛거렸다. 마치 살아있는 한기가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살아있니?*
낮고, 쉰 목소리. 동시에 여러 명이 말하는 듯한 기묘한 울림. 그것은 지혁의 귓속을 파고들어 뇌를 긁어대는 듯했다.
*왜 혼자니?*
*두렵지 않니?*
지혁은 랜턴을 휘둘러 어둠을 찢으려 했다. 빛이 닿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속삭임은 더욱 또렷해졌다. 환영이 아니었다. 이 어둠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천장이 무너진 틈으로 보였던 푸른 하늘이, 갑자기 밝고 따스한 햇빛으로 가득한 과거의 백화점 로비로 변하는 듯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경쾌한 음악 소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건… 아니야.”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허상이 지배하려 드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환영 속에서, 아름다운 얼굴을 한 여인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잃어버린… 아니, 잃어버렸다고 믿어왔던 얼굴. 그의 여동생, 지아였다.
*오빠, 여기 있어. 이제 괜찮아. 이제 집에 갈 수 있어.*
지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애절했다. 그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폐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써 묻어두었던 모든 슬픔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려는 듯했다. 그는 손을 뻗을 뻔했다. 저 허상에 닿는 순간, 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혁은 알았다.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의 여동생 지아는, 이미 오래전에 그의 품에서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 폐허의 시작과 함께.
환영은 그의 가장 깊은 곳에 박힌 상처를 끄집어내어 흔들고 있었다.
“닥쳐…!”
지혁은 이를 갈았다. 눈물이 솟구치려 했지만 억지로 참아냈다. 이곳의 어둠은 그의 감정을 먹이 삼아 자라는 괴물이었다. 감정의 끈을 놓는 순간, 그는 이 어둠 속에 영원히 갇히게 될 것이다.
그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빛이 닿는 곳, 한 조각의 부서진 벽돌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벽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자신의 팔뚝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지혁은 숨을 들이켰다. 팔뚝에서 피가 솟구쳤다. 날카로운 고통이 정신을 번뜩 일깨웠다. 거짓된 안락함의 환영이 잠시 흔들렸다.
*아파…? 왜 스스로를 해쳐?*
속삭임이 당황하는 듯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혁은 정신을 집중했다. 현실의 고통만이 그를 이 저주받은 백화점의 환영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었다.
“죽어…!”
그는 울부짖었다. 그리곤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환영이 흐려지는 틈을 타, 그는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 공간에 더 머무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부서진 진열대를 넘어, 쓰러진 마네킹을 차버리며 그는 미친 듯이 달렸다.
등 뒤에서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을 느꼈다. 속삭임은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다시 혼자가 되겠지…*,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어…*
그는 발길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섰다. 상처 입은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을 뚫고, 그는 마침내 부서진 비상구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은 위로, 지상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계단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지하의 어둠은 그를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그의 발목을 붙잡는 무형의 힘, 귓가를 맴도는 절망적인 속삭임.
그는 무릎으로 기어오르다시피 해서 마침내 찢어진 비상구 문을 밀어젖혔다. 눈부신 잿빛 하늘이 그의 시야에 가득 찼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지상으로 탈출한 지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너진 벽에 등을 기댔다. 팔뚝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처의 고통은 그를 현실로 붙잡아두는 유일한 끈이었다.
멀리서, 또 다른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폐허는 여전히 그에게 죽음을 속삭이고 있었다.
지혁은 피로 얼룩진 손으로 낡은 나이프를 더욱 꽉 쥐었다.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그 어떤 환영도, 그 어떤 절망도, 그의 생존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