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재앙의 그림자가 드리운 지 어언 백 년. 찬란했던 인간의 문명은 한낮 덧없는 꿈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하늘을 찌르던 마천루는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녹슬었고, 아스팔트 도로는 들풀과 이끼에 잠식당했다. 잿빛 먼지가 덮인 대지 위에는 오염된 바람만이 음산하게 울부짖을 뿐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거점을 세웠다. 그중 가장 거대한 요새, ‘벽란성(碧瀾城)’은 폐허가 된 한반도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벽란성에는 고대 문명의 유산과 새로운 기술이 기묘하게 융합되어 있었다. 외부의 짐승떼와 미쳐버린 돌연변이로부터 성을 지켜내는 강철 외벽, 태양열과 지하 지열을 이용한 에너지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 모여든 무림 고수들의 존재였다.

끝없는 혼돈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찾아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벽란성의 원로이자, 과거 ‘도문(道門)’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도인(道人)은 마침내 천하의 운명을 걸 무술 대회를 선포했다. 이름하여, ‘천하제일 무도대회’. 우승자에게는 벽란성의 총수 자격과 함께, 과거 인류가 멸망하기 직전 숨겨두었던 최후의 비밀, 대지를 정화하고 새로운 문명을 개척할 ‘창세의 기록’이 주어질 것이라 했다.

***

류진은 황량한 대지를 걸었다. 그의 등에는 낡았지만 잘 관리된 검이 매달려 있었고, 얼굴은 바람과 모래에 그을려 있었다. 이 세상에 홀로 남은 듯한 고독한 발걸음이었다. 그의 눈빛은 깊고, 저 멀리 보이는 벽란성의 강철 성벽처럼 단단했다.

“드디어… 시작되는군.”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고향은 오래전 붉은 안개에 잠식되어 사라졌다.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오직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뇌정권(雷霆拳)’과 ‘청운검법(靑雲劍法)’뿐이었다. 벽란성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희망보다는, 무언가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는 듯 보였다.

벽란성 입구는 거대한 강철 문으로 닫혀 있었다. 수십 미터 높이의 벽 위에는 레이저 포대와 자동화된 경비병기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문 앞에는 각지에서 온 수많은 무인들이 모여들어 북적거렸다. 찢어진 도복을 입은 자, 기계 팔을 가진 자, 짐승 가죽을 걸친 자 등 면면이 다양했다. 모두 저마다의 사연과 강함을 품고 있었다.

류진은 조용히 줄을 서서 신분 확인을 기다렸다. 그의 차례가 되자, 병사 하나가 스캐너를 들이밀었다.

“이름, 소속.”
“류진. 소속은 없다.”

병사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소속 없는 무인이 벽란성까지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류진의 기세는 명확했다. 감히 시비를 걸 엄두가 나지 않는, 날카로운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스캐너가 녹색 불빛을 깜빡였다.

“통과. 숙소는 서쪽 구역 7동이다. 내일부터 예선이 시작된다. 규정은 벽보를 참조해라.”

벽란성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활기찼다. 과거의 기술과 현재의 필요가 뒤섞여 만들어진 새로운 도시였다. 높은 건물들 사이로는 공중을 가로지르는 이동 수단이 오고 갔고,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눈빛 속에는 한 가지 공통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생존’, 그리고 ‘희망’.

류진은 숙소로 향하며 벽보를 읽었다. 규정은 간단했다. 상대방의 항복 또는 기절, 사망 시 승리. 무기는 허용되나, 지나친 살상은 금지. 그리고 ‘창세의 기록’을 노리는 자들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는 경고가 있었다.

***

예선은 사흘간 이어졌다. 류진은 놀라울 만큼 손쉽게 상대를 제압했다. 그의 주먹은 벼락처럼 빠르고 강했으며, 그의 검은 물 흐르듯 유려하면서도 칼날 같았다. 마치 그 자체가 자연의 일부인 듯,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압도적인 힘이었다. 관중들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탄성을 질렀다.

“저 자는 누구지? 본 적 없는 무인인데…”
“듣자하니, 황무지에서 온 떠돌이 무인이라더군. 실력은 가히 괴물이다.”

류진의 승리가 계속될수록, 그는 점차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본선 진출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오르자, 몇몇 강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시선은, ‘백랑(白狼)’이라 불리는 사내의 것이었다.

백랑은 북방 황무지에서 이름을 떨치던 무자비한 집단의 수장이었다. 온몸에 흉터가 가득했고, 그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마저 날카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주먹은 철을 부수고 바위를 쪼갤 만큼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는 이미 본선에 진출해 있었다.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마치 파괴신 같았다.

본선 전날 밤, 류진은 숙소 뒤편의 조용한 수련장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달빛 아래 그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꽤나 조용한 녀석이군.”

낮게 깔리는 목소리. 류진은 돌아보지 않고도 상대가 백랑임을 알아챘다. 백랑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늑대처럼 번뜩였다.

“당신 같은 강자가 혼자 떠도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벽란성에 줄이라도 대려는 건가?” 백랑이 비아냥거렸다.

류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의 목적은 당신과 상관없다.”

“흥. 모두가 창세의 기록을 노리는 마당에, 상관없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지. 하지만 좋다. 누가 그 기록을 차지하든, 결국 이 천하를 이끄는 건 가장 강한 자의 몫이다. 나는 그게 나라고 생각한다.”

“힘만이 전부가 아니다.” 류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백랑은 코웃음을 쳤다. “힘이 전부가 아니라고?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힘 말고 뭘로 살아남았지? 도망치다 비참하게 죽은 약자들의 시체가 힘이 없어서였다는 걸 잊었나?”

류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백랑의 말은 그의 아픈 과거를 후벼 파는 듯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싸움은 단순한 무술 대회가 아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고, 강자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모두를 위한 길을 모색하는 것이 옳은지… 그 답을 찾는 싸움이다.”

“시시한 소리! 내일 결승에서 보자, 떠돌이. 네가 뱉은 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내 주먹으로 알려주지.”

백랑은 등을 돌려 사라졌다. 류진은 한참 동안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

본선은 벽란성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서 펼쳐졌다. 수천 명의 관중이 운집했고, 벽란성의 원로들과 도인 또한 가장 높은 좌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류진의 첫 상대는 ‘흑풍당’이라는 강철 도적단의 수장이었다. 그는 두 개의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류진은 흑풍당의 거친 공격을 유연하게 흘려내며 빈틈을 노렸다. 흑풍당의 도끼가 땅을 찍어 깊은 균열을 만들었지만, 류진은 이미 그 뒤에 서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기운이 번뜩였다. ‘청룡파(靑龍破)!’ 흑풍당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백랑의 경기는 더욱 잔혹했다. 그의 상대는 ‘만독문’의 고수였다. 독을 뿜어내며 현란하게 움직였지만, 백랑의 망치는 모든 것을 부쉈다. 독을 뒤집어쓰면서도 망설임 없이 돌진한 백랑은 일격에 상대를 제압했다. 경기장은 환호와 함께 공포에 질린 침묵이 교차했다.

준결승에서 류진은 ‘수라도(修羅刀)’라 불리는 검객을 만났다.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차가웠다. 류진은 검을 뽑아 들었다. ‘청운검법’의 진수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두 검객의 움직임은 너무나 빨라 눈으로 좇기 어려웠다. 번뜩이는 강철음과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이 귓전을 때렸다. 류진은 수라도의 검 끝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그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마지막 일격, 류진의 검이 수라도의 검을 쳐내며 그의 목에 닿았다. 수라도는 조용히 검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결승. 류진 대 백랑.

경기장은 거대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류진은 조용히 경기장 중앙에 섰고, 백랑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망치를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떠돌이.” 백랑이 비웃었다. “네놈의 말장난이 내 주먹 앞에서 얼마나 버틸지 보자!”

“말장난이 아니라 신념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강한지,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다.”

백랑이 먼저 움직였다. 거대한 망치가 바람을 가르며 류진에게 날아들었다. ‘파멸격(破滅擊)!’ 류진은 망치를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백랑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뇌정권(雷霆拳)!’ 그의 주먹이 벼락처럼 백랑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묵직한 소리가 울렸지만, 백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근육은 마치 강철 갑옷 같았다.

“겨우 그 정도냐! 실망이군!”

백랑이 역으로 망치를 휘둘러 류진을 후려쳤다. 류진은 간신히 피했지만, 망치의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류진은 거리를 벌렸다. 백랑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었다.

“흐름을 읽어라… 물처럼 움직여라…” 류진은 자신에게 되뇌었다.

류진은 ‘청운검법’을 펼쳤다. 그의 검은 백랑의 망치 주위를 춤추듯 돌았다. 칼날이 백랑의 팔과 다리를 스쳤지만, 백랑의 육체는 굳건했다. 오히려 그는 류진의 움직임을 쫓아가며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

“잔재주를 부리는군! 정면으로 와라!”

백랑이 포효하며 땅을 찍었다. 대지가 흔들리고, 경기장 바닥에 금이 갔다. ‘지진파(地震波)!’ 류진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 순간 백랑이 거대한 망치를 들고 달려들었다. 이대로 맞으면 끝장이었다.

류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 그의 눈빛은 맑고 깊었다. 그의 발이 대지를 스치며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물방울이 바위를 깎듯, 류진의 몸은 백랑의 맹렬한 공격을 비껴나갔다. ‘유운보(流雲步)!’ 예측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며 류진은 백랑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백랑은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의 모든 공격이 닿지 않았다. 류진은 어느새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의 검이 백랑의 목덜미에 닿았다.

“항복해라.” 류진이 속삭였다.

백랑은 망치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토록 굴욕적인 패배는 처음이었다. 그는 포효했다. “닥쳐! 나는… 나는 절대 지지 않아!”

백랑은 몸을 돌리며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그의 전신의 기운이 망치에 집중되었다. ‘천지개벽(天地開闢)!’ 거대한 기운의 망치가 류진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류진은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았다. 그의 온몸에서 푸른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뇌정권의 궁극기, ‘벽력일섬(霹靂一閃)!’ 모든 힘을 한 점에 모아, 벼락처럼 백랑의 망치를 향해 뻗어나갔다.

콰아아앙!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경기장 전체가 흔들렸다. 푸른 섬광과 검은 기운이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먼지가 가라앉자, 경기장 중앙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류진은 겨우 서 있었지만, 백랑은 망치를 놓친 채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관중들은 숨을 죽였다.

도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승자는… 류진이다!”

환호가 터져 나왔다. 류진은 숨을 헐떡이며 백랑을 내려다보았다. 백랑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패배의 좌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네… 네놈… 대체…”

류진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겠나.”

***

대회는 끝났다. 류진은 벽란성의 새로운 총수가 되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창세의 기록’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고대 기술로 만들어진 홀로그램 장치였다. 기록을 재생하자, 과거 인류가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고안했던 방대한 정보와 기술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대지를 정화하는 방법, 새로운 식량을 재배하는 기술, 그리고 과거의 평화를 복원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

그 밤, 류진은 도인을 찾아갔다.

“이것이… 인류의 마지막 희망입니까.”

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지만 기록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을 현실로 만들 의지와 지혜, 그리고 모든 이들을 이끌어낼 용기가 필요하다. 자네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가?”

류진은 창밖의 어둠을 내다보았다. 희망은 멀리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백랑 역시 류진에게 찾아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그의 아래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뜻을 밝혔다. 힘은 나눌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저에게 모든 것을 걸어주십시오. 저는 이 기록을, 이 희망을, 이 벽란성을… 그리고 이 천하를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류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고 있었다. 폐허 속에서 다시 피어날 희망을 향해, 류진과 그의 동료들은 거친 숨을 내쉬며 첫발을 내디뎠다. 대지는 아직 척박했지만, 그들의 심장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류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