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화. 심연의 메아리
고요는 언제나 폭풍 전야의 위장이었다. 차갑고 눅진한 공기가 고대 유적의 무너진 벽 틈새로 스며들어왔다. 아리아는 카엘의 품에 기댄 채, 심장이 불길한 북소리를 울리는 것을 느꼈다. 핏빛 노을이 부서진 창문을 통해 길게 찢어져 들어와, 먼지 낀 바닥과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게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 카엘?” 아리아의 목소리는 파스스 부서지는 낙엽 같았다. 지치고, 두렵지만, 애써 떨림을 감추려 했다.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인간의 그것과는 다른, 고요하고 심연 같은 존재.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간과… 당신의 종족은….” 아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금기였다. 인간에게 ‘드라크’는 재앙이었고, 멸절해야 할 존재였다. 그리고 카엘은, 비록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을지라도, 드라크의 피를 이은 자였다. 그의 눈빛 속에 담긴 태고의 지혜와 차가운 분노는, 어떤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카엘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마치 멀리 떨어진 산맥에서 울려오는 거대한 바위의 메아리 같았다. “끝은 오지 않아, 아리아. 우리를 찾아내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들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어요. 오늘 밤, 저는 꿈을 꾸었어요. 붉은 눈의 그림자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꿈은 꿈일 뿐.”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아리아는 그의 미세한 떨림을 감지했다. 카엘 또한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니,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그녀의 안전뿐일 것이다.
유적의 바깥에서,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기분 나쁜 파공음이 정적을 찢었다. 쉬이이익- 퍽! 아리아의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뭐죠?”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숨어.”
그는 아리아를 벽 뒤, 무너진 석상 아래 깊숙한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절대 거역할 수 없는 강제성이 담겨 있었다.
“움직이지 마. 어떤 소리도 내지 마.”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그 차가움 속에서, 아리아는 희미하게 비늘의 감촉을 느꼈다. 일순간 그의 뺨을 스친 그녀의 손끝에, 인간의 살결과는 다른 서늘하고 단단한 감각이 닿았다. 카엘은 이미 전투 태세를 갖춘 것이다.
쿵. 쿵. 쿵.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리고 이어진 쇠붙이들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그림자 감시단이었다. 드라크를 쫓는 인간 왕국의 특수 병사들. 그들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오직 파괴만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 근방에서 드라크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필시 숨어 있을 터. 샅샅이 뒤져라!”
유적의 입구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명령에 아리아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녀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차가운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카엘은 입구 쪽으로 나아갔다. 그의 등은 아리아에게 너무나 넓고 단단해 보였다. 그의 옆모습은 고요했으나, 그 안에는 거대한 폭풍이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나와라, 드라크! 네 놈의 비겁한 모습은 이미 알고 있다!”
콰아앙!
유적의 거대한 문이 박살 나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먼지 구름과 함께 십여 명의 그림자 감시단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은 붉은 섬광을 띠고 있었다. 드라크의 기운을 추적하는 특수한 마법이 부여된 안경이었다.
카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번뜩였다.
“흥. 인간의 탈을 쓰고 숨어 있었나. 제아무리 모습을 바꾼다 한들, 너희의 악취는 감출 수 없을 터!” 감시단의 대장이 칼을 뽑아 들며 포효했다. 그의 검에서는 푸른 빛의 마법 기운이 일렁였다.
“나는 너희에게 볼일이 없다.” 카엘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네 놈이 인간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볼일이다!”
“크아아악!”
감시단 병사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그들의 검은 섬광을 띠며 카엘에게 쇄도했다.
카엘은 놀라울 만큼 민첩했다. 그의 움직임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검이 그의 피부에 닿기도 전에, 그는 이미 병사들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무기를 쳐냈다. 쨍그랑! 쨍그랑!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난무했다.
그러나 감시단의 수는 많았다. 그들은 드라크 사냥에 특화된 훈련을 받았다. 마법과 검술의 연계는 정교했고, 카엘은 점점 더 수세에 몰리는 듯 보였다.
“카엘…!”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릴 뻔했다. 입술을 깨물어 소리를 억눌렀다. 그의 얼굴에 스치는 칼날, 스치는 마법의 섬광. 그녀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감시단 병사 한 명이 카엘의 옆구리를 노려 강력한 마법 화살을 발사했다. 슈우웅! 카엘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그의 팔뚝에 날카로운 검이 스쳤다.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저 놈을 에워싸라! 약해지고 있다!” 대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엘은 고통으로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눈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의 몸에서 희미한 검은 오라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유적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리아는 알아차렸다. 카엘이 힘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그가 진정한 힘을 사용한다면, 이 모든 병사들은 순식간에 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의 정체가 완벽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여파는…
그때였다.
숨어있는 아리아의 바로 옆, 거대한 석상 뒤편으로 그림자 감시단 병사 한 명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리아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카엘을 측면에서 기습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정확히 아리아가 숨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저기다! 기습!”
아리아는 얼어붙었다. 자신의 존재가 발각될 위기. 그리고 그로 인해 카엘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상황.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카엘의 눈빛이 마치 심연처럼 깊고 짙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그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마기가 유적 전체를 뒤흔들었다.
“건드리지 마!”
카엘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거대한 산맥의 울림 같았고, 태초의 혼돈을 품은 용의 포효 같았다.
콰아아아앙!!!
유적의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카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검은 파동이 그를 에워싼 모든 감시단 병사들을 쓸어버렸다. 병사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들의 갑옷은 산산조각 났고, 몸은 마치 나무 조각처럼 부러지며 벽에 처박혔다.
“크아악…!” 대장만이 간신히 버텨냈지만, 그의 검은 이미 산산조각 난 채였다. 그는 피를 토하며 경악에 찬 눈으로 카엘을 바라보았다.
카엘의 피부는 순간, 검고 단단한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섬광을 내뿜고, 손톱은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처럼 길어져 있었다. 그의 등 뒤로, 희미하게 검은 그림자가 거대한 날개처럼 일렁이는 듯했다.
아리아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눈앞의 카엘은, 자신이 사랑했던 온화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순수한 파괴 그 자체였다.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드라크의 진정한 모습.
“사… 살려….” 대장의 목소리가 헐떡거렸다.
카엘은 대장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마다 유적의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의 손이 대장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대장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다시는… 그녀에게 접근하지 마라.” 카엘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드라크의 것이었다. 뼈를 으스러뜨릴 듯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대장의 눈에서 공포의 빛이 사라져 갔다. 그의 몸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 순간, 카엘의 눈이 다시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의 비늘 덮인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대장을 놓아주었다. 대장의 몸은 무기력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죽은 듯 보였으나, 그의 목에서는 희미한 맥박이 뛰는 듯했다. 카엘은 마지막 순간에 살의를 거두었다.
카엘의 몸을 감쌌던 비늘과 날개의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졌다. 다시 익숙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팔뚝의 상처에서는 여전히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아리아가 숨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려움과 경외,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이 뒤섞인 아리아의 눈동자.
그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유적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들의 금지된 사랑은, 더욱더 깊은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했다.
카엘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아리아….”
그의 목소리는 다시 인간의 것이 되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존재의 고독이 짙게 배어 있었다.
아리아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방금…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경을 목도했다.
그의 본질.
그는 드라크였다. 인간의 적. 파괴의 화신.
유적의 바깥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다음 그림자 감시단의 발소리.
그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인 듯했다.
아리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자신이 속한 모든 세계와 등져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운명은, 그녀 자신마저 집어삼킬 것이라는 것을.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카엘의 손이, 그녀의 눈물에 닿기 직전이었다.
과연 그 손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아니면, 그녀의 세계를 파괴할 검은 심연으로 그녀를 끌어들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