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심연 유적. 그 이름처럼 지옥 같은 곳이었다. 마지막 방의 거대한 문이 육중한 소음을 내며 열렸을 때, 강태한은 옆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현재를 보았다. 녀석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번들거렸지만, 눈빛만은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도착했어, 태한아!” 현재가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그 목소리에는 벅찬 감격과 함께, 어쩐지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수많은 함정과 괴물들을 뚫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다. 녀석의 뛰어난 정보력과 자신의 검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여정이었다. 태한은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피식 웃었다. “그래, 드디어다. 이 모든 고생이 헛되지 않았어.”
방 한가운데, 고대의 제단 위에 놓인 것은 검붉은 심장 모양의 결정체였다. 태초의 심장. 세계의 근원이자, 모든 마법의 정수라고 전해지는 전설의 유물. 숨결이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마력이 들끓는 듯한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태한이 천천히 심장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막 그것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차가운 칼날이 그의 복부를 꿰뚫었다. 피가 뿜어져 나오며 뜨거운 고통이 전신을 집어삼켰다.
“커헉…! 현… 재…?”
말을 잇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시선을 돌리자, 제 칼을 든 현재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친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미소는 그의 마지막 기억과는 전혀 다른 섬뜩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미안해, 태한아.” 현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는 너무 강했어. 너무 뛰어났지. 모든 공은 늘 네 차지였고, 나는 언제나 ‘강태한의 친구’라는 수식어 뒤에 숨어 살아야 했어.”
“무… 무슨… 헛소리…”
현재가 태한의 어깨를 발로 밟아 바닥에 짓눌렀다. 그의 눈빛은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넌 몰랐겠지. 이 유적의 진짜 비밀을. 태초의 심장은 둘이 아닌, 오직 한 사람에게만 온전한 힘을 허락해. 그리고 그 힘은, 그 힘을 가질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온전히 귀속되지.”
현재는 태한의 칼날을 자신의 손으로 움켜쥐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섬뜩하게 웃었다.
“넌 내가 태초의 심장을 차지하기 위한 제물이었어. 네가 쌓아온 모든 공적, 네가 흘린 모든 피와 땀, 네 열정.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한 장작이었지!”
현재는 심장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제단이 거대한 빛을 뿜어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태초의 심장이 현재의 손길에 반응하듯 검붉은 빛을 토해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내 것이다. 강태한. 너는 그저 나 이현재의 위대한 서사에 한 줄의 비극적인 배경이 될 뿐이야.”
현재의 광기 어린 외침이 귓가에 맴돌았다. 등 뒤에서 거대한 파동이 일었다. 유적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태초의 심장이 주인을 맞이하며 그 거대한 힘을 폭주시키는 탓이었다. 현재는 미련 없이 그를 남겨둔 채 빛 속으로 사라졌다.
태한은 짓밟힌 채 피를 토했다. 눈앞의 빛은 점점 멀어지고, 온몸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 어둠이 차올랐다. 친구라고 믿었던 이의 잔혹한 배신. 그 배신이 온몸의 세포를 불태우는 듯했다.
‘이현재…!’
마지막으로 내뱉은 그 이름은 피비린내 나는 저주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暗轉) 되었다.
***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익숙지 않은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나무줄기를 엮어 만든, 칙칙한 갈색의 지붕. 온몸은 거짓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여… 여기는…?”
일으키려고 몸을 움직이자, 뼈마디가 쑤시는 듯한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거울을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던 태한은 눈앞에 비친 자신의 손을 보고 경악했다.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 과거의 굳건한 전사의 손과는 거리가 먼, 보잘것없는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그는 뛰쳐나가 작은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작고, 창백하며, 낯선 이목구비.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보랏빛 눈동자.
이 몸은… 강태한의 몸이 아니었다.
“젠장…!”
그제야 현재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너는 태초의 심장을 차지하기 위한 제물이었다.’ 제물. 그의 죽음이 어떤 의식의 일부였던 것일까. 그는 죽었다. 아니, 정확히는 죽음 직전에 다른 곳으로 전이된 것 같았다. 이세계 전생. 말로만 듣던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다.
분노가 다시금 솟구쳤다. 이현재. 그 이름만 떠올려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모든 것을 잃었다. 오랜 세월 쌓아온 자신의 강함, 동료들, 그리고 친구라고 믿었던 자의 가면 뒤에 숨겨진 악의.
“어디에 있든… 반드시 찾아내겠다. 이현재.”
그는 작은 몸뚱이에서 알 수 없는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세계의 기운이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드는 듯 강렬하게 번뜩였다. 이 낯선 몸, 낯선 힘.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속삭였다. ‘복수하라.’
시간이 흘렀다. 이 낯선 세계에서 그는 ‘칼라스’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림자 부족’이라 불리는, 세상의 변방에서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종족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을 피해 은밀하게 존재했으며, 어둠과 영혼의 힘을 다루는 능력을 타고났다.
처음에는 자신의 과거의 힘을 그리워하며 좌절했다.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던 그의 육체는 이제 유약한 어린아이의 것이었고, 마력을 다루던 그의 능력은 기이한 영혼의 힘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태한, 아니 칼라스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는 오직 하나의 불꽃, 복수만이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그는 그림자 부족의 오랜 영매술과 자신의 과거 경험을 접목시켰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를 움직이고, 죽은 영혼들의 잔재를 빌려 적을 유린하는 기술을 익혔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이제 희미한 영혼의 형체를 꿰뚫어 볼 수 있었고, 그림자의 힘은 그의 몸을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이게 했다. 칼날을 대신해 그림자 촉수를 휘두르고, 마법 대신 영혼의 저주를 엮어냈다.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칼라스는 성장했다. 그의 작은 몸은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인 살육 병기가 되어갔다. 그리고 어느 날, 부족의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된 고대의 유물을 통해 그는 기어이 이세계의 경계를 엿보는 방법을 찾아냈다.
거대한 거울처럼 빛나는 유물에 손을 얹자, 그의 의식이 아득한 공간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익숙한 세계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한때 자신이 속했던 대륙. 그곳의 중심 도시에는 웅장한 개선문이 세워져 있었고, 그 개선문 아래로 수많은 인파가 환호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빛나는 갑옷을 입고 당당히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이현재.
그는 여전히 그 친근하고 호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태한만이 아는 섬뜩한 광기가 숨겨져 있었다. 현재의 등 뒤로는 왠지 모를 위압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그것은 태초의 심장이 그에게 부여한 힘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가 희미하게 그의 귀에 들려왔다.
“이현재 님이 ‘어둠의 심연 유적’에서 태초의 심장을 찾아 세계를 구원하셨어!”
“맞아!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마물들의 위협에 떨고 있었을 거야!”
“강태한이라는 무모한 모험가는 결국 그 위대한 탐험의 제물이 되었다지. 이현재 님은 친구의 희생을 딛고 영웅이 되셨어.”
헛소리. 모두가 현재의 기만적인 서사에 놀아나고 있었다. 자신의 피와 땀, 목숨마저도 녀석의 영웅담을 위한 장식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분노가 다시금 끓어올랐다. 심장을 꿰뚫었던 칼날의 고통이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졌다. 배신당한 친구의 절규가 귓가에 울렸다.
칼라스는 거울 앞에서 조용히 이를 갈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광기 어린 섬광을 뿜어냈다.
“이세계 전생… 그래, 나쁘지 않아. 덕분에 나는 너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존재가 되었다.”
그는 거울 속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현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현재의 마지막 미소보다 더욱 섬뜩하고 차가웠다.
“기다려라, 이현재. 네가 쌓아 올린 찬란한 영광의 탑을, 내가 네 목을 밟고 기어 올라가 산산조각 내 줄 테니.”
칼라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새로운 세상에서 얻은 어둠의 힘이 그의 주변을 감싸고, 복수의 서막을 알리는 듯 짙게 일렁였다.
“네가 내 심장을 꿰뚫었던 그 순간, 나는 죽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지옥을 만들기 위한 씨앗이 되었을 뿐.”
그는 유물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오직 한 곳만을 향해 있었다.
지옥에서 돌아온 자의, 처절하고 잔혹한 복수극을 시작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