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가까운 시간, 아르카디아 마법학원의 중앙 도서관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웅장한 서가 사이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만이 춤을 추듯 일렁일 뿐, 책장을 스치는 바람 소리마저 숨죽인 듯 고요했다. 카엘은 닳고 닳은 고대 마법진 해설서를 펼쳐놓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전혀 다른 곳에 박혀 있었다. 정확히는, 지하 깊은 곳에서 맴도는 어딘가 불길한 기운에.
“젠장, 또 시작인가.”
낮게 중얼거린 카엘의 입가에 피곤한 기색이 스쳤다. 지난 몇 주간, 미약했지만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진동. 처음엔 그저 대형 마법 실험실의 잔여 진동이겠거니 했다. 학원의 지하에는 방대한 마법 연구 시설이 즐비했으니, 있을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단순한 진동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한 박자 느리게 뛰는 듯한 기분과 함께, 차가운 기운이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등골을 타고 오르는 듯했다.
책상 위, 그의 낡은 촛불이 춤추듯 격렬하게 일렁였다. 심지어 촛불의 불꽃 색깔마저 미묘하게 푸르게 변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건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분명 마력의 흐름, 그것도 어둡고 뒤틀린 종류의 마력이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징조였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혹은 이세계에서 얻은 비범한 감각이 비상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이곳에 숨겨진 무언가가, 스스로의 봉인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아르카디아 마법학원. 이 세계 최고의 마법사들이 모여 지식을 탐구하고, 미래를 이끌어간다는 엘리트들의 요람. 그 웅장한 facade 뒤편에 이토록 불안정한 존재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카엘은 책을 덮었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위험하다는 본능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그의 심장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그 기운의 근원을 확인해야만 했다. 과거의 삶에서 수없이 많은 금기를 파헤치고, 위험한 진실들을 마주했던 경험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학원생들의 통행이 금지된 밤의 복도를 따라 발소리 죽여 걸었다. 희미한 달빛만이 창문을 통해 복도를 비추었지만, 카엘의 시야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아니라도, 이세계의 마법 지식만으로도 그는 남들보다 훨씬 예민하게 기척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교내 순찰 마법사들의 마력 흔적을 감지하며, 그림자처럼 벽에 밀착하여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의 목적지는 교수 연구동 최하층. 학원의 최고위층만이 출입을 허가받는다는, 철저히 통제된 구역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창고로 위장된 곳. 그러나 카엘은 그 뒤에 숨겨진 또 다른 비밀 통로가 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바로 지난 며칠간, 그 불길한 마력이 가장 짙게 느껴진 지점이었으니까.
도착한 곳은 낡은 창고 문. 마력으로 잠겨 있는 문을, 카엘은 미리 준비해둔 특수 인장으로 어렵지 않게 열었다. 삐걱이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문은 스르륵 열렸다.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곰팡내와 함께, 썩은 나무와 금속이 뒤섞인 듯한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먼지 쌓인 창고 안쪽 벽면에, 육중한 철문이 하나 더 박혀 있었다. 비상 통로라고 불리는 문. 하지만 그 철문은 그저 위장이었다.
카엘은 철문에 손을 댔다. 차가운 금속 너머로, 희미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가 진정으로 찾던 문은 철문 자체가 아니었다. 철문 옆 벽면에 새겨진, 낡은 문양. 전생의 지식으로도, 이 세계의 마법 지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하고 섬뜩한 문양이었다. 흡사 태초의 혼돈을 표현한 듯한, 뒤틀리고 괴상한 선들의 집합. 손가락으로 문양을 쓸어보니,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흡사 죽은 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사로잡혔다.
“이런 게 학원 지하에 있었다니.”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그의 눈은 호기심으로 번뜩였다. 이건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듯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자신의 마력을 특정 주파수로 조율하여 문양에 주입했다. 벽면을 따라 고대 문자 같은 빛이 번쩍이더니, 이내 벽면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옆으로 열렸다.
내부는 암흑 그 자체였다. 빛 한 조각 없는 깊은 구덩이. 횃불 마법을 사용하자, 손바닥 위에 조그마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 빛은 한계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먹혀 들어갔다.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은 끝없이 이어지는 심연 같았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 벽에는 시커먼 이끼가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고, 간간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눈물처럼 처량하게 들렸다.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갈수록, 아까 도서관에서 느꼈던 불길한 마력이 짙어졌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기운이었다. 그 마력은 단순한 ‘어둠’을 넘어선, 어떤 ‘절규’와 ‘고통’이 응축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학원 관리자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무엇을?
마침내 계단의 끝에 닿았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바닥에서부터 싸늘한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카엘은 횃불 마법을 공중에 띄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한때는 연구실이었을 법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낡은 마법 장치들, 용도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수정구,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고대 문자들. 문자의 형태는 학원에서 가르치는 어떤 언어와도 달랐다. 그러나 전생에서 익혔던 방대한 지식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의미를 부여했다. 문자들은 대부분 금지된 고대 마법에 대한 것이었다. 생명 연장, 영혼 분리, 육체 개조… 금기 중의 금기였다. 이런 끔찍한 실험들이 이곳에서 행해졌다는 것인가?
바닥 한쪽 구석에는 핏자국인지 붉은 액체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사람의 키만 한 족쇄가 벽에 박혀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 아르카디아 마법학원의 지하에, 이토록 끔찍한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니. 학원의 명성은 거짓이었나? 아니면, 이 금기를 연구하다가 학원 자체의 방향이 뒤틀린 것인가?
그때였다. 귓가에 차가운 속삭임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중얼거리는 듯했다.
“…해방… 해방시켜 줘….”
“…죽음…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그에게서… 그에게서 벗어나게 해 줘….”
동시에, 방 중앙에 놓인 거대한 수정구에서 푸른빛이 섬광처럼 터져 나왔다. 빛은 방 전체를 집어삼키는가 싶더니, 이내 수정구 내부에서 형언할 수 없는 형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수많은 영혼들이 뒤섞여 고통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영혼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그들의 눈은 고통과 절규로 가득 차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손들이 수정구 안쪽 유리벽을 필사적으로 긁어대는 환영이 보였다.
카엘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이 학원 지하에 숨겨진 금기, 그것은 살아있는 고통 그 자체였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비명과 절망의 결정체.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이곳을 당장 벗어나야 했다. 위험하다는 경고를 넘어선,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공포가 그를 덮쳤다.
수정구 속의 형체가 마치 자신을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섬광처럼 터져 나온 푸른빛이 그의 시야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동시에 온몸의 마력이 통제 불능으로 날뛰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크윽…!”
온몸의 신경이 불타는 듯한 감각 속에서, 카엘은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금기라면… 대체 그들은 무엇을 봉인하려 했던 것인가?
그리고 그 봉인이, 지금 막 깨어나고 있는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