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하아… 망할 세상. 이럴 거면 멸망이라도 제대로 하든가.”

누렇게 말라붙은 갈대밭 사이로 지아가 쭈그려 앉아 중얼거렸다. 하늘은 뿌연 황사 먼지로 가득했고, 해는 흐릿한 그림자처럼 겨우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그랬다. 멀쩡한 세상이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아주 느릿하게, 마치 병든 사람이 서서히 기력을 잃어가듯, 그렇게 조금씩 죽어갔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물자를 사재기하고, 결국엔 뿔뿔이 흩어져 살 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지아는, 어쩌다 보니 이 척박한 폐허 속에서 살아남는 데 도가 튼 생존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래봤자 오늘의 전리품은 찌그러진 캔 참치 하나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캔 참치는 낡고 녹슬었다. 유통기한 따위는 오래전에 의미를 잃었고, 이런 걸 발견하면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야 했다. 지아는 주머니에서 낡은 칼을 꺼내 능숙하게 캔을 따기 시작했다. 삑, 삐거덕. 캔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삭막한 황야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젠장, 냄새부터가 심상치 않아.”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니 역한 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아마 상했을 것이다. 이런 식이었다. 힘들게 찾아내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지아는 한숨을 쉬며 캔 참치를 내려놓았다. 대신 배낭에서 겨우 찾아낸 딱딱한 건빵 몇 개를 씹었다. 맛?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녀가 바싹 마른 모래땅에 발자국을 남기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오늘 목표는 폐허가 된 옛 주유소였다. 아마 남은 연료는 없겠지만, 혹시 모를 비상식량이나 쓸만한 도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주유소 건물은 형태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한때 번성했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유리창은 깨져나가고 벽은 시커먼 그을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낡은 간판이 삐걱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지아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먼지가 자욱했다. 한때 편의점이었던 곳은 선반이 부러지고 물건들은 엎어져 널브러져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그때였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아래 바닥이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다행히 깊은 구덩이는 아니었다. 한 사람 키 정도 되는 깊이. 무릎에 통증이 왔다. 바닥에는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었다. 지아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젠장, 이제 오도가도 못하게 생겼잖아!

그녀가 팔을 뻗어 위쪽 바닥을 잡으려 애쓰는 순간, 위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 인간. 뭐 하는 중이냐.”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지아에게는 왠지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듯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웬 사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헌팅 재킷에 단단한 부츠를 신고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짜증 나게 잘생겼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안 보이냐? 빠졌다, 이 등신아!”

지아는 짜증을 버럭 냈다. 도와주려면 말없이 도와주지, 질문은 무슨 질문이야? 사내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지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거기서 뭘 찾았지?” 그가 말했다.

“뭘 찾긴 뭘 찾아! 그냥 발이 미끄러진 거라고! 이 구멍은 또 뭔데?”

“내가 먼저 들어섰어야 할 구역이다. 쓸데없이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다니? 이건 그냥 함정이나 다름없었다. 지아는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야, 너 지금 날 보고 이 구덩이를 건드린 거라고 말하는 거냐? 그럼 너나 잘 감시하지 그랬냐? 사람 발 빠지게 만들고선!”

사내는 지아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들린 낡은 손전등으로 구덩이 안을 비췄다. 손전등 불빛이 지아의 얼굴과 구덩이 바닥을 훑었다. 지아가 아까 발버둥 치며 흩어놓았던 낡은 공구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사내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그는 한 손으로 구덩이 가장자리를 짚고 가볍게 뛰어내려왔다. 착지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지아는 그 모습에 살짝 감탄했지만, 이내 자존심이 상해 콧방귀를 뀌었다.

“와, 내려오는 건 기가 막히네. 그럼 이제 사람 좀 꺼내주지 그래?”

사내는 지아의 말은 무시한 채, 그녀의 옆을 지나쳐 반짝이는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낡은 철제 상자였다. 먼지가 쌓였지만, 단단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이게… 설마.”

사내의 얼굴에 희미한 기대감이 스쳤다. 지아는 궁금해졌다. 저렇게 무표정한 인간이 표정 변화를 보일 정도면 뭘까? 그녀도 옆으로 기어가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뭔데? 보물이라도 들어있냐? 설마 황금 같은 건 아니겠지? 이 망한 세상에 황금이 무슨 소용이야.”

사내는 대답 없이 배낭에서 공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지아는 그의 옆에서 깐족거렸다.

“야, 솔직히 나도 찾은 거니까 절반은 내꺼 아니냐? 구덩이에 빠져서 개고생한 대가는 쳐줘야지.”

사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곧 자물쇠를 따는 데 성공했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철제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상자 안에는, 낡고 바싹 마른 육포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그만 물통이 놓여 있었다. 물통 안에는 분명 깨끗한 물이 들어있을 터였다. 지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육포? 물? 이 망할 세상에서 이보다 더 귀한 보물이 어디 있을까!

“와, 미쳤다! 대박!”

지아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사내가 상자를 가로챘다.

“내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야! 이 구덩이 내가 찾았거든? 그리고 내가 먼저 발견했다고!”

“발견한 건 나다. 넌 그저 추락했을 뿐이고.”

“내가 추락해서 네 눈에 띈 거 아니냐? 그러니 절반은 내꺼라니까! 봐라, 육포 냄새도 기가 막히네. 으읍!”

지아가 기어코 육포 한 조각을 움켜쥐려는 순간, 사내가 재빨리 손을 쳐냈다. 육포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지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봐, 이 아저씨! 지금 내 육포를 버린 거냐? 이런 귀한 걸! 죽을래?”

지아는 분노에 차서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밀쳤고, 지아는 가볍게 뒤로 밀려났다. 그에게는 힘에서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망할, 힘센 놈은 항상 이런 식이지!

“나도 배고프다고! 나도 목마르다고! 이봐, 양심이 있으면 좀 나눠줘야 할 거 아니야? 이게 다 같이 살자는 세상이지, 너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세상이냐?”

지아의 날카로운 말에도 사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육포 상자를 닫았다. 물통을 들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꿀꺽, 꿀꺽. 물 넘어가는 소리가 지아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내 구역이다. 나가라.”

“뭐? 내 구역은 무슨 내 구역이야? 폐허에 구역이 어딨어? 그리고 내가 나갈 수 있으면 진작 나갔지, 안 나가고 여기서 네 비웃음이나 듣고 있겠냐? 이 얼음 조각 같은 인간아!”

지아가 씩씩거리며 외쳤다. 그러나 사내는 이미 육포 상자와 물통을 다시 배낭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구덩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위에서 지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일 동쪽 폐기물 처리장으로 와라. 나갈 방법을 알려주겠다. 대신, 오늘 발견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조건이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돌아서서 주유소 밖으로 사라졌다.

“야! 야! 저기요! 이봐요! 도둑놈아! 내 육포! 이 망할 놈의 자식!”

지아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사내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그녀는 주저앉아 바닥을 주먹으로 쿵쿵 쳤다.

“저 망할 새끼! 잘생기면 다냐! 이 야비한 강도 같은 놈! 어딜 내 물건을 훔쳐가! 내일 동쪽 폐기물 처리장? 가긴 어딜 가! 내가 너 같은 놈한테 굽신거릴 줄 알아? 흥!”

지아는 이를 갈았다. 물론, 내일 동쪽 폐기물 처리장으로 갈 것이었다. 어떻게든 저 얼음 조각 같은 인간에게서 육포를 되찾아오리라 다짐하면서. 망할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육포와 물만큼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게다가 저 건방진 작자에게 한 방 먹여주는 것도 꽤나 재미있을 것 같았다.

오늘부터, 폐허의 악녀 지아의 목표는 저 인간에게서 육포를 뜯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와 함께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아직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