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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꺼풀이 무거웠다. 너무 무거워서, 겨우 깜빡일 때마다 세상이 조각조각 부서지는 것 같았다. 김민준은 익숙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삐걱거리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손에 들린 서류 뭉치는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며칠 밤을 새웠더라? 사흘? 나흘? 기억조차 희미했다. 텅 빈 사무실에는 오직 제 숨소리와 키보드 소리, 그리고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만이 존재했다.
‘제발… 제발 이 보고서만 끝내면…’
머릿속에서 누군가 쇠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둔탁한 통증이 울렸다. 민준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어지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글자들이 제멋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컴퓨터 화면 속 숫자들이 일렁이며 거대한 해일처럼 자신을 덮쳐오는 착각에 빠졌다. 숨이 막혔다.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파왔다.
“커헉…!”
거친 기침과 함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책상 모서리에 부딪힌 머리에서 찌릿한 아픔이 솟구쳤다. 차가운 바닥, 희미한 형광등 불빛.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차가운 사무실 천장과 그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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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웠다. 온몸을 휘감는 한기와 축축한 습기가 낯설었다.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두컴컴한 천장과 흙벽이었다.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가 어디지? 병원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의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손을 들어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작고, 앙상한 팔. 피부는 희끄무레했고, 뼈대가 그대로 드러났다.
“말도 안 돼…”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쉰 듯 갈라지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민준은 패닉에 빠졌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주위를 둘러봤다. 낡고 좁은 오두막. 한쪽 구석에는 짚으로 엮은 침대가 있고, 그 위에는 해진 누더기 이불이 덮여 있었다. 창문도 없는 흙벽에는 간신히 빛이 들어오는 작은 구멍이 전부였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꿈이야. 지독한 악몽일 거야. 하지만 몸에 느껴지는 생생한 허기와 한기는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분명 죽었을 터였다. 그 차가운 사무실 바닥에서. 그런데 왜… 왜 이런 곳에서, 이런 몸으로 눈을 뜬 거지?
기억을 더듬었다. 이 몸의 이름은 리온. 열 살. 부모를 알 수 없는 고아. 마을 변두리의 허름한 오두막에서 홀로 살아가며, 툭하면 병치레를 하는 연약한 아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존재조차 희미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존재.
하룻밤 사이에 김민준은 사라지고, 연약한 리온이 되어버린 것이다.
리온의 몸은 늘 배고픔에 시달렸다. 죽었을 때도 그랬지만, 이 몸은 더 처절했다. 민준, 아니 리온은 이를 악물었다. 살아야 했다. 이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다시 한번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며칠 동안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마을 구석의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숲 가장자리에서 독이 없는 열매와 풀뿌리를 찾아 헤맸다.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냉대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리온은 그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흐읍… 흐읍…”
이날도 리온은 숲으로 향했다. 마을 근처의 숲은 이미 지천으로 널린 풀뿌리나 버섯조차 찾기 힘들었다. 그는 더 깊이,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살갗이 긁혔지만, 리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라도 찾아야 해. 뭐라도…’
정신없이 걷던 리온은 발밑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진동에 걸음을 멈췄다. 아주 희미했지만, 분명 땅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떨림이었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규칙적인 박동이 느껴졌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 숲은 꽤 자주 다녔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는 진동의 근원을 찾아 주위를 둘러봤다. 낡고 거대한 바위들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언덕배기였다. 그중 유난히 검고 이끼 낀 바위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바위틈에서 아주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건… 뭐지?’
마을 사람들은 숲 깊숙한 곳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깃든 곳’이 있으니 가지 말라고 경고하곤 했다. 하지만 리온은 그런 미신보다 당장의 허기를 더 두려워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바위로 다가갔다. 바위틈은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균열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충분히 몸을 욱여넣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입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푸른빛은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분명했다.
약간의 망설임. 하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뿜어내는 알 수 없는 끌림은 리온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좁은 틈새로 몸을 구겨 넣었다.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몇 걸음 들어가자 흙으로 된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은 아래로 비스듬히 경사져 있었다. 푸른빛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발아래의 흙은 차갑고 축축했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래된 흙냄새와 함께, 이전에 맡아본 적 없는 묘한 향이 섞여 있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시야가 환해졌다. 리온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동굴 끝에 다다르자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마치 누군가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듯 완벽한 원형의 벽에는 정교하고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들은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공간의 중앙에는 투박하게 깎인 돌 제단이 놓여 있었는데,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리온은 홀린 듯 그 빛나는 문양들에 이끌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벽에 새겨진 문양들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손을 뻗어 한 문양을 만지려 하자, 벽 전체가 격렬하게 파동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채웠다.
“으악!”
눈을 가늘게 떴다. 빛 속에서, 문양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마치 물결치듯 일렁이며, 그의 눈앞에 거대한 환영이 펼쳐졌다.
수천 년 전의 풍경. 거대한 존재들이 하늘을 날고, 땅을 가르는 마법을 부리며 문명을 건설하는 모습.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난해한 지식들이 뇌리에 박혔다. 그는 마치 태초의 기운을 직접 접하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전율. 피가 끓고,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그것은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희열이었다. 마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감각. 그의 몸을 이루는 모든 것이 재구성되는 듯했다.
“크아아악!”
리온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몸 안의 모든 에너지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는 간신히 눈을 들어 제단 위의 문양들을 바라봤다. 이제 그 문양들은 그의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 깊숙이, 영혼에 새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정신이 끊어질 듯한 순간, 그는 마지막으로 이 고대 마법이 속삭이는 듯한 이름을 들었다.
*원천(源泉)*.
그것은 모든 마법의 시작이자 끝이며, 이 세상의 근원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제, 그 근원의 힘이 연약한 리온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리온은 알 수 없는 확신을 느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그저 보잘것없는 고아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손에, 이 세계를 뒤흔들 고대의 힘이 쥐어졌다는 것을.
암흑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 암흑은, 죽음의 차가운 어둠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태초의 따뜻한 암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