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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노을 아래의 약속

솔아는 늘 그랬듯 해 질 녘 공동 화덕 앞에 앉아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불꽃이 장작을 집어삼키며 후끈한 열기를 뿜어냈고, 그녀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노릇하게 구워진 빵들이 나무 쟁반 위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웠다.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저녁 바람을 타고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평화로운 풍경이 거짓말 같다는 것을 솔아는 너무나 잘 알았다. 제국의 그림자는 언제나 마을 어귀에 드리워져 있었고, 화덕에서 피어나는 연기조차도 감시의 눈에는 거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빵은 단순한 식량이 아니었다. 서로를 이어주는 약속이자, 지친 이들의 위로였다.

어린 소년, 태오가 작은 바구니를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의 눈은 빵을 향한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누나, 오늘 빵은 무슨 이야기예요?”
태오는 늘 빵에 이야기를 묻곤 했다. 솔아는 피식 웃으며 가장 큼지막한 빵 하나를 골라 그의 바구니에 넣어주었다.
“오늘은 말이야… 굳건한 희망의 이야기지. 아무리 거친 바람이 불어도 뿌리 깊은 나무는 쓰러지지 않으니까.”
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빵을 품에 안았다. 그 작은 어깨에 담긴 희망의 무게가 솔아는 늘 아프면서도 기뻤다.

어스름이 짙어질 무렵, 마을 어귀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이 지긋한 약재상 할머니, ‘나리 할머니’였다. 나리 할머니는 늘 허브와 약초를 찾아 멀리까지 나섰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지쳐 보였다. 주름진 손에는 작은 바구니 하나가 들려 있었고, 바구니 안에는 흔한 들풀 몇 다발이 얹혀 있었다.

솔아는 나리 할머니에게 따뜻한 차를 내어드렸다.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차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는 피로와 함께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오늘도 멀리 다녀오셨네요, 할머니.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그래, 솔아야. 오늘은 좀 더 멀리 다녀왔지. 바람이 좋지 않더구나.”
할머니의 눈빛이 솔아에게 닿았다. 그 눈빛 속에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조용히 바구니를 솔아 앞으로 밀었다. “이 풀들… 좀 다듬어 주려무나. 뿌리까지 깨끗하게 말이다.”

솔아는 바구니 안의 들풀을 들여다보았다. 여느 들풀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바구니 속을 더듬자, 가장 아랫부분에 깔려있던 잎사귀 하나가 유독 뻣뻣하고 색깔이 달랐다.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솔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긴급 전갈.’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뻣뻣한 잎사귀를 뽑아 품속에 감추고, 다른 들풀들을 마저 다듬기 시작했다. 나리 할머니는 차를 마시며 벽에 걸린 마른 약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한 할머니의 모습은 솔아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주었다.

“요즘 마을에 순찰이 잦아졌어.” 나리 할머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특히 동쪽 길목을 조심해야 할 게야. 새로 부임한 감찰관이 아주 집요하다고 하더구나.”
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잎사귀의 글씨를 떠올렸다. ‘내일 새벽, 세 번째 초롱불이 켜지기 전, 숲 속 샘터. – 황야의 표범.’

황야의 표범. 그것은 저항 조직의 비밀 연락책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직접 나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초롱불이 켜지기 전’이라는 시간은, 해가 뜨기 직전의 가장 어둡고 위험한 시간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마을은 고요에 잠겼다. 솔아는 화덕의 잔불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방에 홀로 앉아, 품속의 잎사귀를 꺼냈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더듬었다. 잊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다. 제국의 감시망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최근 인근 마을에서 반역자로 몰려 끌려간 이들의 이야기가 파다했다. 붙잡히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솔아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별들이 총총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별들도 언젠가는 제국의 어둠에 가려질까.
그녀의 머릿속에 태오의 말이 다시 울렸다. “굳건한 희망의 이야기.”
그 희망을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오늘밤은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솔아는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마을의 모든 이들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따뜻한 빵으로, 약초로, 그리고 마음속의 굳건한 희망으로.

솔아는 작은 등불을 켰다. 바싹 마른 잎사귀를 불꽃 가까이 가져가 글씨를 다시 한번 읽고, 곧바로 불에 태웠다. 글씨가 새겨진 잎사귀는 한 줌의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기억과 결단뿐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내일 새벽, 어둠 속에서 그녀를 기다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불안감은 여전히 가슴을 짓눌렀지만, 등불의 작은 불꽃처럼, 그녀의 마음속에도 꺼지지 않는 결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다. 고요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불안한 밤이었다. 내일, 샘터에서 무슨 이야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새로운 약속이 맺어지게 될까. 솔아는 깊은 숨을 내쉬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굳건한 희망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