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펑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 밤의 불청객**

밤은 언제나 젖어 있었다. 희미한 네온사인들이 아파트 창밖으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었고, 끊임없이 내리는 산성비는 뿌연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며 도시의 흉측한 민낯을 가렸다. 이진은 익숙한 광경에 별다른 감흥 없이 눈을 깜빡였다. 거실의 지능형 조명 ‘루미나’는 그의 감정 상태를 읽어내듯 미묘하게 색을 바꿨다. 오늘 하루는 엿 같았다. 루미나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핏빛에 가까운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루미나, 노멀 화이트. 조도 50퍼센트.” 이진이 나직이 명령했다.
음성 인식 시스템이 잠시 딜레이 되는가 싶더니, 곧 따뜻한 아이보리색 조명이 거실을 채웠다. 보랏빛은 사라졌지만, 왠지 모를 싸늘함은 여전했다. 그는 낡은 소파에 몸을 던졌다. 푹 꺼지는 쿠션이 그의 피로를 전부 삼키는 듯했다. 손에 들린 데이터패드를 무릎 위에 대충 던져놓고 눈을 감았다. 고층 빌딩 사이를 오가는 드론 택시의 윙윙거리는 소리, 저 멀리서 울리는 공장 지대의 사이렌 소리가 빗소리와 뒤섞여 묘한 도시의 자장가를 불렀다.

피로가 몰려왔지만 잠이 오진 않았다. 이진은 다시 눈을 떴다. 창밖을 응시했다. 무수한 불빛들이 점멸하며 도시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탁.’

아주 미세한 소리. 이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부엌 쪽에서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옆집에서 물건을 떨어뜨렸겠지. 아니면 위층 녀석들이 또 뭘 만들고 있는 걸까. 이 좁디좁은 도시에서 프라이버시란 허상에 가까웠다.

그는 데이터패드를 들어 스포츠 채널을 틀었다. 무중력 농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화려한 그래픽과 선수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쿵.’

이번엔 좀 더 선명했다. 부엌 쪽이었다. 이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슬리퍼를 끌며 부엌으로 향했다. 조용했다.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스틸 조리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덕션도 꺼져 있었고, 냉장고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도 떨어진 물건은 없었다.

“젠장. 내가 피곤하긴 한 모양이군.”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머그컵이 아주 미세하게 –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린 것처럼 – 옆으로 스르륵 움직였다. 이진은 눈을 비볐다. 잘못 봤겠지. 착시현상일 거야.

하지만 컵은 멈추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조용히, 모서리를 따라 움직이더니, 이내 싱크대 모서리를 지나 허공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컵이 산산조각 났다. 이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피로 때문에 헛것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봤다. 그 어떤 외부의 힘도 없이, 컵이 스스로 움직여 떨어지는 것을.

“누… 누구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정적만이 부엌을 지배했다. 깨진 컵 조각들이 섬뜩하게 빛났다. 이진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렀다.

“루미나, 부엌 조명 켜!” 그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루미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즉시 응답했을 시스템이 묵묵부답이었다. 이진은 다시 명령했다.
“루미나, 부엌 조명! 지금 당장!”
여전히 침묵. 마치 루미나 자체가 먹통이 된 것 같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루미나는 메인 서버와 24시간 연결되어 있었고, 시스템 오류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진은 공포에 질려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였다. 거실에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분명 모든 창문과 문은 잠겨 있었다. 고층 아파트에서 틈새 바람이 들어올 수는 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한기는 처음이었다.

거실 쪽에서 낮은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마치 수많은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소리. 이진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실은 아까 이진이 설정했던 아이보리색 조명 아래 고요했다. 그런데 소파 위에 놓여 있던 데이터패드가 저절로 화면을 켰다. 스포츠 채널이 아닌, 뉴스 속보 화면이었다. 무작위로 뜨는 헤드라인들. 그리고 그 위로, 기괴한 상형문자들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는 그런 글자를 본 적이 없었다. 마치 고대 문자와 미래 기술의 결합처럼 보였다.

‘쉬이이이…’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환청일 리 없었다. 너무나도 선명했다. 마치 이진의 바로 뒤에서 누군가 숨을 쉬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진의 눈은 무언가를 포착했다.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 – 그의 유일한 가족 사진이 담긴 – 가 벽에서 아주 살짝 떨어져 있는 것을. 그리고 그 액자 뒤에서, 그림자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시야에 들어오면 사라지고, 시야에서 벗어나면 다시 나타나는 잔상 같았다.

“이게… 뭐야…” 이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림자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거실 바닥 전체를 뒤덮었다. 루미나의 조명이 다시 미친 듯이 붉은색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웅얼거림은 점점 더 커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데이터패드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전자음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이진의 발밑에 있던 거실 러그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더니, 그의 발목을 휘감았다. 차갑고 질척거리는 감촉에 이진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그의 눈앞에는, 벽에 걸린 가족 사진 속에서, 그의 어린 조카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검은 그림자가 조카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사진 속에서 이진을 똑바로 응시하며,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진은 바닥에 뒹굴며 몸부림쳤다. 벗어나려 할수록 러그는 더욱 강하게 그의 몸을 옥죄었다. 천장에서 들려오는 굉음, 벽에서 튀어나올 듯한 그림자들, 그리고 귓가를 찢는 듯한 전자음 속에서, 이진은 마침내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고장이나 피로로 인한 환각이 아니었다.

그의 아파트에, 아주 불쾌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것도, 초대받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