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별을 삼키고 있었다.
한반도의 깊은 산골, 천년의 역사를 품은 무림의 심장부라 불리던 태화산맥은 최근 들어 알 수 없는 기운에 휩싸였다. 밤하늘을 수놓던 별들은 제자리를 잃고 흐느적거리는 물감처럼 번져갔으며, 맑고 투명하던 계곡물은 이따금 검붉은 핏빛으로 변해 흘렀다. 산짐승들은 뼈가 녹는 듯한 기이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고, 드물게 모습을 보이던 고승이나 은거 기인들마저 광기에 사로잡혀 자신의 제자들을 찢어 죽이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무림은 공포와 혼돈에 휩싸였다.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모든 문파의 장문인들은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발버둥 쳤으나, 누구도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깊이 파고들수록 알 수 없는 존재의 그림자에 이끌려 정신을 잃는 자들이 늘어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무림 문파에 하나의 비보(秘報)가 전해졌다. 발신지는 알려지지 않은 채, 오직 ‘운명대회’라는 세 글자와 함께 특정 장소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섬뜩한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시험. 강자는 살아남아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고, 약자는 심연에 침잠하리라. 이 대회에 불참하는 자는 존재 자체가 소멸할 것이며, 그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비보를 받은 후에도 참가를 망설이던 몇몇 중소 문파들이 실제로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사라진 이들에 대한 기억마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기현상까지 목격되자, 무림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모든 고수들이 운명대회에 참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
무영(無影).
그는 무림에서 가장 기이한 검법을 쓰는 사내였다.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잡히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정파도 사파도 아닌, 스스로 ‘무상검(無相劍)’이라 칭하는 그의 검술은 그를 만나본 모든 이들에게 혼돈과 경외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는 강했지만, 어떤 문파에도 소속되지 않았고, 어떤 대의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구름처럼 세상을 유랑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운명대회의 비보는 도착했다. 종이 위, 정교한 글씨체 사이로 스며 나오는 듯한 섬뜩한 기운은 여느 무공의 살기(殺氣)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차가운 무심한 눈동자조차 미세하게 흔들렸다.
“천하의 운명이라….”
그는 낡은 객잔의 창가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은 여전히 흐느적거리고 있었고, 그 사이에는 본래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 같은 거대한 검은 구멍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빨을 드러낸 심연의 입 같았다.
“재미있군.”
무영은 빙긋 웃었다. 그의 내면에 잠재된 기이한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었다. 그는 무의미한 싸움이나 권력 다툼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미지의 위협 앞에서는, 그의 검이 자연스레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무상검은 이런 것을 상대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
대회 장소는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수천 년 전 버려진 고대 도시의 유적이었다. 거대한 돌기둥들은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솟아 있었고, 비정형적인 문양으로 뒤덮인 벽화들은 보는 이의 눈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모래바람은 핏빛으로 물든 듯 붉었고, 태양은 마치 심연의 눈동자처럼 어둡고 기괴한 빛을 내뿜었다.
이곳에 모인 고수들은 삼백 명이 넘었다. 무림맹의 맹주부터 마교의 교주, 은둔한 세외 고수들까지, 한 시대를 풍미하던 강자들이 모두 집결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초조하거나, 광기에 물든 눈빛을 하고 있었다. 며칠 밤낮을 걷는 동안 수많은 이들이 발작을 일으키거나,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두르다 모래에 파묻혀 죽어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영은 그들 사이에 섞여 고요히 서 있었다. 그의 검은 언제나처럼 등 뒤에 매달려 있었으나, 그의 존재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았다.
“무상검 무영이라…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이야.”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다가왔다. 무림맹의 칠대 고수 중 한 명인, 천뢰문(天雷門)의 뇌정신군(雷霆神君)이었다. 온몸에서 천둥 같은 기운을 뿜어내는 거구의 사내였다. 그의 눈빛은 비장했으나, 미세하게 흔들리는 동공은 그 역시 내면의 불안과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뇌정신군께서는 여전하시군요.” 무영은 담담하게 답했다.
“여전하다니, 이 상황에서 태평한 소리를 하는 것은 자네뿐일세.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 저 끔찍한 형상들은 자네를 괴롭히지 않는가?” 뇌정신군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모를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꿈은 꿈일 뿐, 현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정말 현실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나? 나는… 나는 내공심법을 운용하며 수십 년간 다져온 심법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지 않아야 할 것이 들린다.” 뇌정신군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고대 도시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제단에서 섬뜩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기묘한 색깔이었고, 빛이 닿는 곳마다 모래알들이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고수들이여, 환영한다.”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으나, 여러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겹쳐 들리는 듯한 기괴한 울림이었다. 목소리의 진동은 고막을 찢을 듯했고, 듣는 이의 이성을 잠식하려는 듯한 불쾌한 공명을 일으켰다.
제단 위에는 망토를 뒤집어쓴 의문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수십 명이었으나, 모두가 똑같은 얼굴, 똑같은 체형을 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존재가 여러 육신을 빌려 나타난 듯했다.
“운명대회의 첫 번째 시련은 바로 ‘심안(心眼)의 시험’이다. 이곳은 오래된 봉인이 깨져나가고 있는 곳. 너희의 무공이 아닌, 너희의 정신이 얼마나 강한지 시험할 것이다.”
한 사내가 제단 위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수정구슬이 들려 있었다. 기묘하게 빛나는 수정구슬은 마치 우주의 작은 파편을 담아 놓은 듯, 그 안에 셀 수 없는 별들과 은하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 ‘아크람의 눈’을 보라. 너희의 가장 깊은 두려움과 욕망, 그리고 감추고 싶었던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이겨내는 자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이요, 그렇지 못한 자는 영원히 심연에 갇히리라.”
무림 고수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저것이 단순한 환술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교의 교주조차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이미 자신의 심법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 도전자는 무림맹의 젊은 천재, 소림의 혜명(慧明) 선승이었다. 그는 수십 년간 좌선을 통해 마음을 다스려온 강자였다. 혜명은 단단한 자세로 수정구슬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흔들림 없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좌우로 흔들렸고,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터져 나왔다. 이내 그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의 눈은 이미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고, 손톱으로 자신의 얼굴을 마구 할퀴었다. 그의 몸에서 엄청난 내공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화입마였다.
“크아아악!” 혜명은 피를 토하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망토를 뒤집어쓴 사내들이 그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들의 움직임은 섬뜩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웠다.
두 번째 도전자는 한 여협이었다. 그녀는 구슬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눈을 찔러 뽑으려 했다. 결국 실명한 채 끌려갔다.
세 번째, 네 번째… 수많은 고수들이 절규하고, 피를 토하고,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그들의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내면의 심연 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무영은 차례를 기다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뇌정신군조차 이미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침내 무영의 차례가 왔다. 그는 태연하게 제단 위로 걸어 올라갔다.
“무영. 무상검의 주인이라 들었다. 네 검은 그림자를 가르나, 너의 그림자는 어찌할 것인가?” 망토 사내가 기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영은 대답 없이 수정구슬을 응시했다.
푸른빛과 보라색이 뒤섞인 수정구슬 속에서 무영의 모습이 비쳤다. 그러나 그 모습은 곧 일그러지며 변형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어린 시절의 상처, 과거의 후회, 이루지 못한 꿈,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존재의 공허가 형상화되어 나타났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서 피어난 가장 끔찍한 환영이었다.
환영 속에서 무영은 끊임없이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 무상검의 경지를 파고들수록 느껴지는 현실과의 괴리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왔다. 현실 속의 그는 아무도 아니었다. 그의 검이 유일한 존재의 증명이었다. 그런데 그 검조차도… 이 환영 속에서는 아무것도 가를 수 없는 무형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환영은 점점 더 기괴해졌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더 이상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셀 수 없는 눈동자들이 박힌 촉수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 촉수들은 무영의 가장 깊은 공포를 끄집어내며 속삭였다.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네 검은 아무것도 가르지 못해. 네 존재는 그저 허상일 뿐. 우리는 너의 근원이며, 너는 우리의 일부일 뿐….”*
목소리는 뇌리를 파고들어 그의 심법을 뒤흔들었다. 몸 안의 내공이 역류하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혜명 선승이 그랬듯이, 그의 심법이 무너지고 이성이 잠식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거대한 심연의 입이 자신을 삼키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무영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그의 무상검은 이미 수없이 많은 ‘허상’을 가르고 ‘무(無)’를 파고들었다. 그의 검술은 형태가 없다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고 초월하는 경지였다. 그리고 그는 그 무(無)의 공간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립하는 법을 터득했다.
무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고요했다. 수정구슬 속 환영은 여전히 그를 향해 끊임없이 속삭이고 비틀렸지만, 무영은 더 이상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무(無)는 존재의 시작이요, 끝이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만 존재한다.”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심연을 꿰뚫는 듯했다. 그는 환영 속의 자신을, 그리고 자신을 조롱하는 촉수들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환영은 ‘나’의 그림자일 뿐, ‘나’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무상검은 본래 그림자를 가르는 검이 아니었다. 그림자, 즉 허상을 무(無)로 돌리는 검이었다.
무영은 검을 뽑아 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저 수정구슬을 꿰뚫어 볼 듯 응시했다. 그의 심의(心意)가 수정구슬을 향해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것은 형태 없는 검기, 무상검의 근원이었다.
‘나는 무상이다. 그 어떤 형태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그 어떤 그림자에도 사로잡히지 않는다.’
수정구슬 속의 환영들이 잠시 멈칫했다. 촉수들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 갔다. 구슬 속의 무영은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고, 구슬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 깊고 고요해졌다.
망토 사내들이 당황한 듯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은… 아크람의 눈을 통과했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라, 무영.”
기괴한 목소리의 주인이 말했다. 무영은 아무 말 없이 제단에서 내려왔다. 그는 여전히 고요했으나, 그를 바라보는 다른 고수들의 시선에는 경외감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의 내면이 어떤 심연을 마주하고 돌아왔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자는 오십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절반 이상의 고수들이 광기에 사로잡히거나 주화입마에 빠져 실려 갔다. 그들 중에는 뇌정신군도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았으나,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무영은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망토 사내들이 다가왔다.
“너희는 심연을 엿보고도 버텨냈다. 이제 너희는 더 큰 진실과 마주할 자격이 있다.”
사내들은 남아있는 고수들을 이끌고 고대 도시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지하 신전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문은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위에는 기이한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무영은 그것들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형상들임을 직감했다.
신전 안은 광활하고 어두웠다. 공기 중에는 흙먼지와 함께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천장에는 마치 거대한 존재의 뼈대 같은 것이 얽혀 있었고, 그 사이에서 이따금 푸른 빛이 깜빡였다.
중앙에는 거대한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위에는 거대한 검은 돌덩이가 놓여 있었다. 돌덩이는 매끄러웠으나, 그 표면에는 셀 수 없는 눈동자들이 박혀 있는 듯했다. 눈동자들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응시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돌덩이에서는 낮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이었다.
“이것은 ‘어둠의 심장’이다.” 망토 사내가 말했다. “오래전, 천하를 집어삼키려 했던 심연의 존재를 봉인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봉인이 약해지면서, 그 존재의 기운이 천하를 잠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운명대회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무림맹의 차기 맹주 후보인 백무진(白武眞)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는 냉철한 이성을 가진 젊은 고수였다.
“어둠의 심장은 단순히 봉인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너희의 내면을 파고들어, 봉인을 완전히 깨부수려 한다. 너희 중 가장 강한 자만이 이 심장을 완전히 봉인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침묵시킬 수 있다.”
“방법은?” 백무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곳에 있는 고대 경전들을 익혀야 한다. 그것은 심연의 존재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제어하는 고대의 주술이 담겨 있다.”
사내들은 제단 주변에 놓인 수십 권의 낡은 서책들을 가리켰다. 서책들은 오래되어 바스러질 듯했으나, 그 안에는 인간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림들과 문자들이 가득했다. 무영은 그 서책들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심안의 시험을 통과하며 겪었던 광기와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명심하라. 이 지식을 파고들수록 너희의 정신은 더욱 깊은 심연으로 끌려갈 것이다. 주화입마를 넘어, 진정한 광기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심연을 극복한 자만이 진정한 힘을 얻을 것이다.”
망토 사내들의 말은 잔인한 진실이었다. 고수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 싸움은 더 이상 단순한 무공 대결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이성과 정신력을 건,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건 최후의 도박이었다.
무영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서책 중 가장 오래되고 기이한 문양으로 뒤덮인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도형과 문자들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렸고, 뇌리에 직접적으로 불쾌한 감각을 전달했다. 그의 무상검이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무상검의 경지에서, 모든 형태와 의미를 해체하고 무(無)로 돌리는 방법을 익혔던 그는, 이 난해한 지식의 심연을 직면할 수 있었다. 그는 문자를 읽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의미’와 ‘파동’을 이해하려 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였으나, 무영에게는 유일한 길이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흘, 혹은 삼십 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고수들은 서책에 매달려 미친 듯이 지식을 파고들었다. 어떤 이는 미소를 지으며 눈에서 피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파내려 했다. 또 어떤 이는 갑자기 일어서서 다른 고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무공은 한 단계 상승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이성은 심연 속으로 침잠했다.
백무진만이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거의 백발이 되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경전을 통해 심연의 존재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별들 너머에서 온… 고대의 악이다.” 백무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 망토 사내들은… 그것의 추종자들이다!”
그는 갑자기 칼을 뽑아 망토 사내들을 향해 휘둘렀다. 그의 검기는 번개처럼 빠르고 강렬했다. 그러나 망토 사내들은 백무진의 검을 손쉽게 막아냈다. 그들의 손에는 인간의 것이 아닌, 뼈와 살이 기묘하게 뒤섞인 기형적인 무기가 들려 있었다.
“어리석은 필멸자여. 이제야 진실을 깨달았는가?” 망토 사내 중 하나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기괴해졌다. “너희가 쌓아 올린 무공은 그저 우리 존재의 파편을 담아낸 것에 불과하다. 운명대회는 너희의 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우리가 섬기는 심연의 군주를 부활시키기 위한 거대한 제의였다!”
그 순간, 신전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단 위의 ‘어둠의 심장’이 더욱 맹렬하게 고동쳤고, 그 안의 눈동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려는 듯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고수들은 경악했다. 자신들이 심연의 존재를 봉인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부활시키기 위한 제물이었다니!
“오오, 위대한 크투르투여! 그대에게 바쳐질 필멸자들의 힘이여!” 망토 사내들은 일제히 기괴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들의 망토가 벗겨지면서 드러난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뼈대가 뒤틀리고, 피부가 녹아내린 듯한 끔찍한 형상이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크투르투…?” 백무진은 처음 듣는 이름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이름은 그의 뇌리를 파고들어 고통을 주었다.
무영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서책 속의 지식이 그에게 심연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망토 사내들의 정체, 그리고 이 거대한 제의의 목적까지. 그는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진실만을 받아들였다.
“어리석은 짓이다.”
무영의 목소리가 고요히 신전 안에 울려 퍼졌다. 그의 눈은 푸른 빛과 보라색이 뒤섞인 기묘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듯했다. 그의 등 뒤에 매달려 있던 검집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검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검이 아니었다. 빛도, 그림자도 아닌, 그저 ‘무(無)’ 그 자체의 형상이었다. 보는 이의 눈을 기만하고,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불가사의한 칼날이었다.
“네놈들의 군주가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결국 형태를 지닌 존재에 불과하다. 형태가 있는 것은 무상(無相)의 검 아래 무(無)로 돌아갈 뿐!”
무영의 몸에서 무상검의 기운이 폭발했다. 그것은 내공이나 외공과는 다른,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힘이었다. 신전의 공기가 일그러지고, 고대 문자들이 새겨진 벽이 마치 연기처럼 사라지는 듯했다.
“저것은…! 인간의 경지가 아니다!” 망토 사내들이 경악했다.
무영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손끝으로 검의 형태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검을 통해 심연의 심장을 향해 뻗어 나갔다.
“무상검, 공(空).”
그의 외침과 함께, 그의 검에서 푸른빛과 보라색이 뒤섞인 파동이 터져 나왔다. 그 파동은 소리도 없이 어둠의 심장을 향해 나아갔다. 어둠의 심장을 감싸고 있던 눈동자들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다.
*“감히… 필멸자가…!”* 어둠의 심장에서 직접적인 의지가 뇌리를 강타했다. 그것은 끔찍한 고통과 함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위압감이었다. 그러나 무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무상검은 이미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형태가 있는 것이 어찌 무형을 가를 수 있겠는가. 무(無)는 모든 것을 삼킬 수 있으나, 모든 것은 무(無)에 닿을 수 없다.”
무영의 말이 끝나자, 어둠의 심장을 감싸고 있던 기이한 눈동자들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현상이었다. 푸른빛과 보라색 파동이 어둠의 심장 내부로 침투하자, 심장에서 흘러나오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망토 사내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주가 필멸자에게 저항할 수 없는 타격을 입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안 돼! 크투르투 님!” 그들은 필사적으로 무영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기괴한 무기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무영의 심장을 노렸다.
그러나 무영은 이미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닌 듯했다. 그의 주변에는 무상검의 기운이 무형의 보호막처럼 펼쳐져 있었다. 망토 사내들의 공격은 그 보호막에 닿자마자, 마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무(無)로 돌아가라.”
무영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손에 든 무형의 검이 한 번 번뜩였다. 망토 사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들고 있던 기형적인 무기들마저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어둠의 심장은 이제 더 이상 고동치지 않았다. 모든 눈동자가 사라지고, 매끄럽고 검은 돌덩이만이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거기서는 더 이상 어떠한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죽은 돌덩이처럼 변해 있었다.
무영은 무형의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신전의 균열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흐느적거리고 있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덜 불길해 보였다.
백무진을 비롯한 살아남은 몇 명의 고수들은 이 모든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무영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그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이성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한 줄기 섬광처럼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한 ‘무상(無相)’의 존재를 경외감과 공포가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무영은 천천히 신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고요했다. 그는 더 이상 무림의 그 어떤 무인도 아니었다. 심연을 엿보고, 그 심연과 맞섰으며, 결국 심연을 침묵시킨 그는, 이제 새로운 존재의 경지에 도달한 듯했다.
천하는 잠시 평화를 되찾을 것이었다. 그러나 무영은 알고 있었다. 심연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침묵했을 뿐, 언젠가 다시 고개를 들고 필멸자들의 존재를 위협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때 다시 무형의 검을 들고 심연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인간적인 슬픔이나 기쁨이 없었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함과, 별들 너머의 광활한 심연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무영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그림자는 모래 위를 따라 길게 늘어졌다가, 이내 희미해지며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