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혔다.
지하 수로의 축축한 공기는 흙먼지와 비릿한 쇠 냄새가 섞여 들숨마다 가슴을 짓눌렀다. 횃불의 희미한 불꽃이 좁은 통로를 따라 늘어선 그림자를 기괴하게 춤추게 했고, 그 그림자만큼이나 불안정한 눈빛들이 강율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사흘째다.” 강율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쇳소리처럼 거칠었다. “식량은 나흘 치. 병력은 지난 번 습격으로 삼분의 일 이상을 잃었다. 더 이상 버티는 건… 의미가 없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서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형형했다. 서연은 이 참혹한 현실 속에서 그나마 이성이라는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의 손에는 닳아빠진 지도가 들려 있었다. 지도의 한쪽 구석이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탈라 항구다.” 서연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국의 보급선이 이틀 뒤 밤에 정박한다. 동부 전선으로 향하는 모든 물자가 거기에 실릴 거다. 식량, 무기, 그리고… 신병들.”
그녀의 말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신병들이라는 말에 몇몇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 중에는 제국에 끌려간 가족을 둔 이들도 많았다.
“탈라 항구는 요새나 마찬가지입니다, 서연 님!” 젊은 진호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과 함께 분노가 일렁였다. “얼마나 많은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보잘것없는 저희 병력으로는…”
“알고 있다.” 서연이 진호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눈은 강율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대로 사흘을 더 버티다 죽거나,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 기회에 모든 것을 거는 수밖에.”
강율은 아무 말 없이 바닥에 쭈그려 앉아 부러진 단검 조각을 만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다. 평생 농기구만 잡던 손이었다. 제국의 폭정 아래 빼앗긴 삶을 되찾겠다고 칼을 들기 전까지는.
“이번 습격의 목표는 두 가지다.” 강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깊은 심연처럼 어두웠으나, 그 안에 타오르는 불꽃은 맹렬했다. “보급 물자를 탈취하고, 가능하면… 제국의 고위 간부 중 한 명을 생포한다.”
숨죽인 정적이 흘렀다. 고위 간부 생포. 그것은 단순한 식량 확보를 넘어, 제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제국의 목덜미를 직접 쥐어 잡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성공한다면 더 많은 이들을 반란에 동참시킬 명분이 될 것이고, 실패한다면… 남은 반란군마저 재기 불능으로 만들 치명적인 독이 될 터였다.
“미쳤군.” 늙은 투사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삶의 모든 풍파를 겪어낸 듯한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결국 우리는 죽음을 택하는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럴지도 모르지.” 강율이 나직이 말했다. 그의 시선은 늙은 투사를 지나, 좌절과 희망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동지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하지만 우리는 소가 아니다. 피를 흘릴지언정, 눈을 감고 도축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탈라 항구는 철저한 감시 아래 있습니다.” 서연이 다시 지도에 손가락을 짚었다. “정문과 서쪽 부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동쪽 외곽의 폐쇄된 창고 구역입니다. 이곳은 경비가 상대적으로 허술하지만, 내부 통로가 복잡하고 낡아서 붕괴 위험이 높습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진호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창고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저희는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겁니다.”
“정말 안전한 길이 있었다면, 애초에 우리가 이 지하 굴에 숨어 있지도 않았겠지.” 서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뼈아픈 현실이 담겨 있었다. “선택은 단순해. 죽느냐, 마느냐.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다시 한번 짙은 침묵이 흘렀다. 횃불의 불꽃이 벽에 드리운 그림자를 더욱 길게 늘어뜨렸다. 지독한 불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강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감은 그 어떤 거인보다도 압도적이었다. 그의 눈빛이 동지들 하나하나와 마주쳤다.
“이번 작전은… 자원자들로만 꾸린다.” 강율이 단호하게 말했다. “강요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해라.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는 이 암울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다.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의 후손들이, 제국의 발굽 아래 짓밟히지 않고 자유롭게 숨 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의 목소리는 낮은 저음이었지만, 마치 거대한 바위가 굴러가는 듯한 무게감이 있었다. 몇몇은 고개를 숙였고, 몇몇은 강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오랜 시간 억눌렸던 불꽃이 다시금 피어오르는 듯했다.
“저, 제가 가겠습니다!” 진호가 가장 먼저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창고 구역은 제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늙은 투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체념이 아닌,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숙련된 전사의 각오가 서려 있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다. 이 칼이 녹슬기 전에 제국 놈들의 피라도 한번 더 봐야지.”
하나둘씩, 그림자 속에서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두려움이 역력했지만, 그와 동시에 기이한 결의가 함께 스며들어 있었다. 이들은 제국의 거대한 폭압 앞에서 자신의 삶을 포기당했던 자들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오직 자유만을 갈망하는 불나방들이었다.
강율은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들의 눈빛에서 그는 자신이 처음 칼을 들었던 그날의 자신을 보았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절망 속에서 피어난 마지막 희망.
“좋다.” 강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비장한 미소가 스쳤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설령 이 목숨이 다한다 해도, 우리의 투쟁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기억해라. 우리는… 횃불이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지하 수로의 차가운 물줄기는 멈추지 않고 흘렀다. 그 소리는 마치 피를 갈구하는 제국의 심장 박동처럼, 혹은 새로운 새벽을 향해 나아가는 반란군들의 발걸음 소리처럼,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길을 향해 나섰다. 제국의 심장을 향한,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비장한 행군이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