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각(靑巖閣) 앞은 스산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새벽녘 싸늘한 바람이 묵직한 침묵을 실어 날랐고, 대청마루에 모인 청암문(靑巖門)의 장로들과 고수들의 얼굴에는 망연자실함과 불길한 예감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한곳, 굳건히 닫힌 청암각의 문에 꽂혀 있었다. 문 너머에는 청암문의 정신적 지주이자 가장 깊은 경지에 도달했던 백운(白雲) 장로가 시신으로 누워 있었다.
“설명해 보거라,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
문주인 현천(玄天) 진인이 이마에 핏발을 세운 채 격노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분함을 잃고 깊은 분노를 담고 있었다. 옆에 선 오행당(五行堂)의 당주, 강호(剛虎) 장로가 고개를 숙였다.
“문주님. 저희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봉인진(封印陣)에는 일절 훼손된 흔적이 없습니다. 오행 봉인진은 장로님께서 수련에 드시기 전, 직접 안에서 발동시키셨고, 문과 창문은 물론 벽체 전체에 완벽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바깥에서 강제로 돌파한 흔적도 없고, 안에서 부수고 나간 흔적도 없습니다. 봉인진은… 완벽하게 작동 중입니다.”
강호 장로의 목소리에도 당혹감이 역력했다. 청암각의 오행 봉인진은 청암문의 자랑이자 외부 침입을 완벽히 막아내는 최강의 방어막이었다. 일단 안에서 발동되면 바깥에서는 어지간한 절정 고수가 아닌 이상 깨뜨릴 수 없었고, 설령 깨뜨린다 해도 엄청난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청암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히 서 있었다. 오행 봉인진의 푸른 기운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백운 장로께서는 어떻게 돌아가셨다는 말이냐! 허공에서 솟아난 귀신이라도 죽였다는 말이냐!”
현천 진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주변의 돌기둥을 산산조각 냈다. 그만큼 그의 분노는 폭발적이었다.
그때, 저만치 산길을 따라 한 인영이 느릿느릿 걸어 올라왔다. 흰 도포 자락이 바람에 살랑였고, 어딘가 세상만사에 초연한 듯한 걸음걸이는 긴장감 넘치는 이곳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젊은 사내였다. 앳된 얼굴과는 다르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주변을 스치듯 훑었다. 그의 이름은 운현(雲峴). 청암문에서 가장 이단적인 천재로 불리는 자였다. 그는 검술도, 내공 수련도 아닌, 고대의 진법과 기문둔갑(奇門遁甲) 같은 비기에 몰두하는 괴짜였다. 하지만 그의 통찰력만큼은 문주인 현천 진인조차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늦었구나, 운현아.” 현천 진인은 운현을 보자 그제야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길이 멀었습니다, 문주님.” 운현은 태평하게 대답하며 청암각에 다가섰다. 그의 시선은 봉인진의 푸른 기운을 따라 흘렀다.
강호 장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운현, 너는 어찌하여 이런 중대한 시점에 느긋하게 걸어오는 게냐? 백운 장로께서… 돌아가셨다!”
운현은 강호 장로를 힐끗 보더니 다시 청암각을 응시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시각에 제가 서둘러봤자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그보다는… 완벽하다는 봉인진의 기운이 평소와 조금 다르군요.”
그의 말에 현천 진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무엇이 다르다는 것이냐?”
운현은 청암각 주변을 한 바퀴 천천히 돌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오행 봉인진은 본래 외부의 기운을 완벽히 차단하고 내부의 기운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게 합니다. 허나, 지금 이 봉인진은… 분명 완벽하게 외부를 차단하고 있으나, 내부의 기운 흐름이 어딘가 부자연스럽습니다. 마치 억지로 붙잡아 둔 것처럼 미세한 떨림이 느껴집니다.”
주변의 장로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의 눈에는 완벽한 봉인진만 보일 뿐이었다.
현천 진인은 운현을 믿었다. “운현아, 네 말대로 봉인진에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낼 수 있겠느냐?”
운현은 아무 말 없이 청암각의 정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문에 대었다. 청량한 기운이 그의 손을 통해 봉인진으로 흘러들어 가는 듯했다.
“안타깝지만, 문제가 아니라 ‘흔적’입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 봉인진은 누군가 외부에서 강제로 침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또한, 안에서 파괴하고 나간 흔적도 없습니다. 이 봉인진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도 없는’ 완벽한 밀실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다들 혼란스러운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어찌된 것이냐! 누가 장로를 해했단 말이냐?” 강호 장로가 초조하게 물었다.
운현은 문에서 손을 떼고는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범인은… 안에 있었거나, 아니면 안에 있을 수 없는 방식으로 사라졌습니다. 봉인진이 완벽하다는 전제 하에 말입니다. 하지만 이 봉인진은 완벽한 밀실을 만들지만, 동시에 범인이 ‘탈출’하는 데에도 이용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현천 진인조차 숨을 죽였다.
“운현아, 그게 무엇이냐?”
운현은 청암각의 지붕을 가리켰다. “오행 봉인진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방을 봉쇄하지만, 단 한 곳. 그 기운이 가장 약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시선이 청암각의 처마 끝, 기와 사이의 미세한 틈새를 향했다.
“봉인진의 기운이 하늘로 흩어지는 가장 미세한 순간. 그때, 아주 잠깐 동안만 이 봉인진은 ‘투과(透過)’될 수 있습니다.”
강호 장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말도 안 된다! 그곳은 아무리 봉인진의 기운이 약하다 한들,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물론입니다. 사람이 드나들 수는 없죠.”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운(氣運)’은 드나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운을 이용하여… 특정 물질을 안에서 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습니다. 봉인진은 ‘생명체’의 출입을 막는 데는 완벽하지만, 아주 미세한 기운의 흐름까지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그게 바로 이 오행 봉인진의 유일한 약점입니다.”
“그것이 백운 장로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현천 진인이 물었다.
운현은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관이 있습니다. 백운 장로의 몸에는 외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독살이거나, 기운을 통한 공격이겠지요. 그리고 오행 봉인진은 외부의 기운을 차단하기 때문에, 독살이라면 독을 안에서 제조했거나, 독을 들고 들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기운을 통한 공격이라면… 굳이 직접 들어갈 필요는 없죠. 봉인진의 미세한 틈새를 이용한다면, 아주 작은 기물이나 기운을 넣거나 뺄 수 있으니까요.”
그의 말에 현천 진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봉인진을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문주님. 봉인진이 완벽한 밀실이라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으나, 그 밀실을 통해 범인이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을 가능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운현의 얼굴에는 이제 조금의 긴장감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는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이미 백운 장로의 죽음과 봉인진의 비밀이 얽혀 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안에서 나간 범인의 흔적은 없었을 겁니다. 봉인진이 모든 흔적을 깨끗이 지워버렸을 테니까요. 하지만 범인은 안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남겼을 겁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범인이 존재했음을 알려줄 테니까요.”
모두의 시선은 다시 청암각의 문에 꽂혔다. 이제 그들에게는 운현의 말대로, 미세한 기운의 흐름을 분석할 수 있는 단서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단서는 오직 밀실 안, 백운 장로의 시신 옆에 있을 터였다. 침묵 속에, 현천 진인은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봉인진을 해제하라. 조심스럽게.”
모두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봉인진이 해제되고 문이 열리는 순간, 과연 운현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할 단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인가. 차가운 바람만이 청암각 주변을 맴돌며 그들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