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새벽의 그림자

강태오는 숨을 들이켰다. 낡은 방독면 필터 너머로 스며드는 공기는 흙먼지와 부패한 금속 냄새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폐로 직통하는 독기보다는 나았다.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가장 귀한 자원은 깨끗한 물도, 먹을 것도 아닌, 숨 쉴 수 있는 ‘안전한 공기’였다. 그마저도 이제는 필터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어, 매번 한숨을 쉴 때마다 묵직한 부담감이 폐부를 짓눌렀다.

무너진 고층 건물들 사이, 텅 빈 유리창들은 썩어가는 동물의 눈동자처럼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늘은 뿌연 잿빛이었다. 해가 뜨기는 했는지, 아니면 그저 먼지 구름 너머에서 희미하게 빛을 잃어가고 있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강태오는 낡은 등산화가 딛는 아스팔트 조각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부서진 철근이나 숨겨진 함정에 발목이 잡힐까 봐. 혹은, 더 나쁜 것을 건드릴까 봐.

“빌어먹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방독면 안에서 먹먹하게 울렸다. 식량은 거의 바닥났다. 어제 겨우 찾아낸 딱딱한 통조림 하나가 전부였다. 물도 간당간당했다. 이제는 빗물을 모아 정수하는 것도 한계에 달했다. 이대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그는 오늘 반드시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강태오의 시선이 한때 백화점이었을 거대한 철골 구조물에 닿았다. 완전히 주저앉지는 않았지만, 건물 외벽은 거의 다 뜯겨나가 내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간판은 녹슬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그나마 온전한 조각들은 덩굴식물에 뒤덮여 있었다. 그래도 아직 기대할 만한 곳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드나들었을 법한 곳은 오히려 위험했다. 백화점이라면, 폐쇄되기 직전까지도 물건들이 가득했을 테니, 어쩌면 아직… 아주 작은 희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조심스럽게 건물 내부로 통하는 듯 보이는 거대한 균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는 화려했을 입구는 이제 거대한 돌무더기와 찢겨진 철근으로 막혀 있었다. 틈새로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곳을 찾았다. 몸을 웅크리고, 등에 멘 낡은 배낭이 돌 틈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내부는 지독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빛이 잘 들지 않아 랜턴을 켜야 했다. 희미한 불빛이 닿는 곳마다 먼지 덮인 잔해들이 드러났다. 산산조각 난 진열대, 뒤집어진 마네킹,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녹아내린 전자제품들. 시간은 이곳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산산조각 나버린 듯했다.

강태오는 텅 빈 시야를 훑었다.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식료품 코너를 찾았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누군가에게 탈탈 털린 지 오래인 듯했다. 포장지는 뜯겨져 나뒹굴고, 선반은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이라곤 이름 모를 씨앗 몇 알과 썩은 과일 조각뿐. 그는 실망감을 삼키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런 대형 건물에 들어올 때마다 느껴지는 이질감이 있었다. 생명이 사라진 공간. 한때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과 소음으로 가득했을 이곳은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것이 남아있으면, 오히려 잃어버린 과거 때문에 미쳐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때, 저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익.

금이 간 쇠붙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 강태오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랜턴의 불빛을 끄고,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에는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녹슬었지만 날카롭게 갈아둔 철근 조각이 쥐어졌다.

그것은 무엇일까? 다른 생존자? 아니면… ‘그것들’?

강태오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공기는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귀를 쫑긋 세우고 미세한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쥐라도 지나간 걸까? 아니면 바람이 무너진 잔해들을 스치고 지나간 소리일까?

다시, 끼이이익.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서 들렸다. 그리고 철근이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도. 척, 척.
강태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소리는 마치, 사람이 무언가를 질질 끄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천천히 기둥 뒤에서 몸을 기울여 소리의 근원지를 살폈다.

어둠 속, 멀지 않은 곳에서 움직이는 희미한 그림자가 보였다.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몸, 그리고… 길게 늘어진 팔. 팔 끝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달려 있는 듯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것’이었다.

강태태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것들’은 빛에 민감했다. 소리에도 반응했다. 최대한 움직임을 줄여야 했다. 다행히 ‘그것’은 강태오가 있는 쪽을 향해 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편, 즉 백화점의 더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는 것이리라. 혹은… 단순히 이곳을 배회하고 있을 뿐이거나.

강태오는 ‘그것’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단 1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어 쑤셨다.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방독면 속 공기가 눅눅하게 젖었다.

살았다. 간신히.

그는 ‘그것’이 지나간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이 백화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었다.

랜턴을 다시 켰다. 이번에는 더 조심스럽게, 가장 낮은 밝기로 설정했다. 움직이는 잔해들의 틈새를 살피며 걷는데, 그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젠장.”

작게 욕설을 뱉으며 발을 뺐다. 바닥에 놓여 있던 것은 녹슬었지만 꽤 견고해 보이는 금속 상자였다.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지만, 표면은 비교적 깨끗했다. 강태오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어 올렸다. 무게감이 느껴졌다. 안에는 무언가 들어 있었다.

어쩌면… 귀한 것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상자를 품에 안고, 조금 더 안전해 보이는 기둥 뒤로 이동했다. 녹슨 걸쇠를 힘껏 당기자, 뻑뻑한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안에서 희미한 빛이 반사됐다.

상자 안에는 여러 개의 비닐 포장지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반짝이는 작은 조각들이.

강태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식량도, 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더 귀한 것이었다.

새 필터. 방독면용 필터였다. 그것도 여러 개가! 포장도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멸망 전에 생산된 것으로 보였다. 그는 한 개를 꺼내 들었다. 묵직하고 단단한 감촉이 손에 와 닿았다.

“이런… 이런 미친.”

안심과 동시에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폐허를 헤매는 생존자에게 새 필터는 목숨 그 자체였다. 이 정도면 한동안은 안전하게 숨 쉴 수 있었다. 이 필터들은 단순히 호흡기 보호구가 아니라, 더 멀리, 더 오염된 지역까지 탐사할 수 있는 기회였다. 즉, 더 많은 자원을 찾을 수 있는 열쇠였다.

강태오는 필터들을 조심스럽게 배낭에 넣었다. 그 위에 얇은 천을 덮어 가렸다. 다른 것을 더 찾아야 했지만, 이미 필터만으로도 오늘 수확은 대박이었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그는 다시 움직였다. 이제는 조금 더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이런 작은 행운 하나가 다시 살아갈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그의 발이 멈췄다.

무너진 벽 너머로 보이는 공간. 그곳은 한때 백화점의 식품 창고였던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선반은 비어 있거나 부서져 있었지만,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커다란 상자들 무리가 눈에 띄었다.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끌렸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상자 하나를 열었다. 안에는 먼지 낀 포장지로 싸인 캔들이 가득했다. 종류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정도 양이라면 며칠, 아니 몇 주를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희망에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곧 싸늘한 직감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상자 안의 캔들을 꺼내려 손을 뻗는 순간, 상자들 뒤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붉게 빛나는 두 개의 점.

그것은 강태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숨 막히는 정적.

강태오는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손끝의 캔은 차갑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두 개의 붉은 눈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것들’ 중 하나였다. 그것도, 아까 지나쳐 간 것보다 훨씬 크고, 훨씬 위협적인 존재였다.

강태오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탈출해야 한다. 당장.

하지만 어디로?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