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 잿빛 도시의 그림자

하준은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 위를 미끄러지듯 걸었다. 닳아 해진 전투화 밑창이 날카로운 파편에 긁히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잿빛 하늘 아래, 도시는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빌딩들은 과거의 번영을 비웃듯 하늘을 찔렀고, 녹슨 차량들은 길거리에서 영원히 멈춰 선 채 녹슬어 가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사흘 전 빗물을 모아 마신 게 전부였다. 입술은 바싹 말라 갈라져 있었고, 뱃속에서는 굶주림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배낭 속에는 낡은 칼과 몇 개의 빈 병, 그리고 먼지 앉은 라이터가 전부였다. 스물둘,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지만, 그 나이라는 숫자 외에 그를 설명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 속 부모님의 희미한 얼굴과 부서지기 전 세상의 어렴풋한 잔상만이 그를 인간으로 만들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준은 텅 빈 도로 한가운데 멈춰 섰다. 저 멀리, 비교적 온전하게 서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나갔지만, 얼핏 보기에 옛 백화점 건물 같았다. 저런 곳이라면, 어쩌면… 물 한 병이라도, 썩지 않은 통조림 하나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희미한 희망이 가슴 한구석에서 가늘게 피어올랐다.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이 폐허에는 하준 같은 인간 외에도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변형된 짐승들, 굶주림에 미쳐버린 다른 생존자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

백화점 건물에 다다르자, 입구는 거대한 금속 셔터가 반쯤 내려진 채 각종 잔해와 뒤엉켜 있었다. 옆쪽의 작은 출입문은 아예 통째로 뜯겨나간 상태. 하준은 낡은 칼을 고쳐 쥐고 조심스럽게 내부로 들어섰다.

“젠장.”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건물 내부는 암흑 그 자체였다. 부서진 진열대, 널브러진 옷가지들, 깨진 마네킹의 사지들. 퀴퀴한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으스스한 정적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리는 듯했다.

하준은 휴대용 손전등을 꺼내 불을 밝혔다. 약해진 건전지 탓에 빛은 겨우 앞을 비출 정도였다. 일층을 대충 훑어본 후, 그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는 멈춰 선 채 녹슬어 있었지만, 지하로 통하는 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지하 식료품 코너… 분명히 있을 거야.’

기대와 불안감이 뒤섞였다. 지하는 보통 더 어둡고, 더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한숨을 깊이 내쉬고, 하준은 에스컬레이터의 멈춰 선 발판을 밟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에 발을 디디는 순간, 싸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위층보다 훨씬 더 깊은 어둠. 손전등의 빛이 닿는 곳은 겨우 몇 걸음 앞이었다. 거대한 공간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진열대는 쓰러져 있고, 상품들은 대부분 약탈당했거나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그때였다.

_스스스륵._

아주 희미한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하준의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재빨리 손전등을 끄고 벽에 바싹 몸을 붙였다. 낡은 칼을 꽉 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다.

_쉬이이이이익…_

마치 거대한 뱀이 기어오는 듯한 소리.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붉은 눈이 하준의 시야에 들어왔다. 크고 흉측한 형체. 과거의 동물과는 확연히 다른, 끔찍하게 뒤틀린 육체. ‘변형체’였다. 놈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하준은 숨을 멈췄다. 움직이면 안 된다. 놈은 시각보다 청각과 후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변형체의 움직임이 멈추는가 싶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하준이 숨어 있는 곳으로 성큼 다가왔다.

_쉬이익!_

놈이 길고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하준이 기댄 진열대를 박살 냈다. 파편이 튀었다.

‘젠장! 들켰어!’

하준은 옆으로 몸을 날려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손전등을 켜서 변형체의 얼굴을 비췄다. 놈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통스러운 듯 울부짖었다. 잠시의 빈틈. 하준은 놓치지 않았다.

“죽어!”

그는 낮게 포효하며 낡은 칼을 변형체의 다리에 힘껏 내리꽂았다. _끄어어억!_ 놈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하준은 칼을 빼내지 않고 그대로 놈의 육체에 박아둔 채 몸을 던져 최대한 멀리 달아났다. 부서진 진열대와 쓰러진 상품들을 헤치며 필사적으로 뛰었다. 놈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과 추격하는 발소리가 등 뒤를 쫓았다.

하준은 간신히 꺾인 통로로 몸을 숨겼다. 손전등을 꺼뜨리고 숨을 죽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폐가 아팠지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변형체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_놈이 갔나?_

아니, 함정일 수도 있다. 놈은 영리했다. 하준은 미동도 없이 낡은 진열대 뒤에 웅크리고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숨을 죽인 채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차가운 금속 캔이 손에 잡혔다.

_철컥._

따개 소리는 죽음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손에 잡힌 것은 낡은 참치 통조림이었다. 변형체는 들리지 않는지 미동도 없었다. 하준은 천천히 통조림을 열었다. 냄새를 맡았다. 약간 비린내가 났지만, 썩은 냄새는 아니었다. 오래되었을 뿐, 먹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붉은 눈이 번뜩였다. 하준은 식은땀을 흘렸다. 놈은 여전히 여기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크윽….”

하준은 참치 통조림을 놓지 않은 채, 배낭에서 다른 물건을 꺼냈다. 낡은 섬유로 된 천 조각. 그는 그것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 불꽃이 어둠 속에서 작게 타올랐다. 천 조각에 불이 옮겨붙자, 하준은 그것을 힘껏 변형체를 향해 던졌다.

_화르륵!_

불이 붙은 천 조각이 변형체의 몸에 닿자, 놈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빛과 열에 약한 놈의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불길이 놈의 몸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놈은 미쳐 날뛰며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타, 하준은 반대편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결국 놈은 불길에 휩싸여 쓰러졌다. 간신히 따돌린 것이다. 하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느 벽 뒤에 주저앉았다. 손이 떨렸다. 간신히 얻어낸 참치 통조림을 입에 밀어 넣었다. 비린 맛, 짠맛, 그리고 묘한 금속 맛이 섞였지만, 그 어떤 음식보다 달콤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물병 하나가 잡혔다. 먼지가 가득했지만, 뚜껑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하준은 병마개를 따고 물을 마셨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생명수와 같았다.

잠시의 안도감.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둠 속에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통조림과 물 한 병. 이것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일은 또 어디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까.

하준은 텅 빈 폐허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멀리 희미하게 빛이 스며드는 지하의 통로를 바라보았다. 저 빛은 희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일까.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숨쉬고, 움직이고, 살아남는 것만이 전부였다. 잿빛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그의 작은 숨결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