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장. 붉은 달 아래, 금지된 맹세
어둠이 내린 숲은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나뭇잎 스치는 소리마저도 비밀스러운 속삭임처럼 들려왔고, 저 멀리 희미하게 반짝이는 반딧불이만이 유일한 길잡이였다. 시아는 제 발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심장이 쿵쿵, 가슴 속에서 저만의 북소리를 내고 있었다. 두려움보다는, 곁을 걷는 카이의 존재가 주는 묘한 긴장감 때문이었다.
“너무 깊이 들어왔나? 위험할지도 몰라.” 시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카이의 손에 들린 횃불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힐끗 바라봤다. 그림자는 춤추듯 일렁이며 주변의 거대한 나무들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카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시아를 돌아봤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맑고 깊었다. 마치 숲의 모든 지혜를 담고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괜찮다, 시아.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그의 목소리는 숲의 바람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흔들림 없는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
시아는 괜스레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괜찮다’고 하면 정말 괜찮을 것만 같은, 그런 막연한 믿음이 그녀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믿음이 얼마나 위태로운 모래성 위에 서 있는지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 시간, 이 숲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카이 또한,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는 존재였다.
카이는 숲의 아이였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심장은 숲과 함께 뛰고, 그의 숨결은 숲의 생명과 이어져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 사이를 그림자처럼 움직였고, 숲의 동물들은 그를 경외하며 따랐다. 그의 종족은 인간과 오랜 세월 동안 공존하면서도, 결코 섞이지 않는 금기를 지켜왔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종족의 경계를 허무는 일은, 두 세계 모두에게 용납될 수 없는 죄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금기를 이미, 발밑의 낙엽처럼 조용히 짓밟고 있었다.
카이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든 횃불이 숲의 한구석을 비추자, 시아의 눈앞에 거대한 고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뿌리가 땅속 깊이 박혀 온 숲을 지탱하는 듯한 위엄 있는 나무였다. 나무의 몸통에는 오래된 상처들이 깊게 파여 있었고, 그 상처들 사이로 푸른빛의 이끼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이 어디야?” 시아가 숨을 삼키며 물었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그녀를 에워싸는 듯했다.
“우리 종족의 조상들이 잠든 곳.” 카이가 말했다. 그의 시선은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 끝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
시아는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카이는 그녀를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의 공간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이곳은 외부인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 성스러운 장소임이 분명했다.
“왜… 날 이곳에 데려온 거야?” 시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카이가 횃불을 나무 아래 깊숙한 곳에 박아 넣었다. 불꽃이 흔들리며 주변을 밝히자, 그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시아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빛은 이제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오직 시아만을 담고 있었다.
“이곳에서 맹세하고 싶었어.”
시아는 그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맹세? 무엇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두렵고도 간절한 감정이 뒤섞여 그녀의 내면을 흔들었다.
카이가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고 다시 한 발짝. 그는 시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의 손길은 뜨겁지 않았지만, 뼈 속 깊이 파고드는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존재다. 너의 시간에서 온 이방인이자, 나의 종족에게는 이질적인 존재.” 그의 목소리가 낮고 조용하게 숲에 울렸다. “하지만 내 심장은 너를 알아봤어. 나의 존재가 너를 원해.”
시아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카이. 이건 잘못된 길이야. 너도, 나도… 서로의 세계를 파괴하게 될 거야. 너희 종족이 알면…!”
“알면 어떠한가.” 카이가 시아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빛은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너를 만난 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에 모든 것을 걸겠어.”
그 순간, 숲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울음소리에 시아는 몸을 떨었다. 숲의 밤을 깨우는, 불길하고 거친 소리였다.
카이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는 시아를 제 등 뒤로 숨기며 주변을 경계했다. 횃불의 불꽃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뭐… 뭐야? 무슨 소리야?” 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이 우리를 찾고 있어.” 카이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결기가 서려 있었다. “금지된 만남을 엿본 자들.”
숲의 어둠 속에서, 수많은 붉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사냥감을 포위하듯, 그들의 존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은 숲의 수호자들, 혹은 금기를 수호하는 존재들이었다. 카이의 종족에게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숲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감시자들이었다.
카이는 시아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마치 하나의 뿌리처럼 단단하게 얽혔다.
“시아. 도망치지 마. 그들이 원하는 건… 바로 나야.” 그의 눈빛은 절박했지만, 동시에 깊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너를 보내지 않아. 너를 지킬 거야. 이것이 나의 맹세다.”
붉은 달이 숲 위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달빛은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 핏빛 아래에서 금지된 사랑을 맹세한 두 존재는, 이제 숲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시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더욱 커지고, 붉은 눈동자들은 더욱 거세게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밤, 숲의 가장 깊은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