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이한은 메마른 대지를 묵묵히 걸었다. 발밑의 흙은 오래전부터 생명을 잃은 채 바스러졌고, 바람은 살을 에는 듯한 모래 먼지를 실어 날랐다. 태양은 항상 구름 뒤에 숨어,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희망마저 가려버린 듯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폐허뿐이었다. 녹슨 철근이 뼈대처럼 앙상하게 솟아오른 건물 잔해들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유골처럼 흉측하게 서 있었다.
어깨에 둘러멘 낡은 배낭은 그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물통, 건조된 식량 몇 조각, 그리고 고장 난 부품들을 주워 모아 겨우 작동시키는 휴대용 스캐너. 이한의 손에 들린 것은 더 낡고 더 귀한 것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닳고 닳은 가죽 지도였다. 희미한 선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가득한 그 지도는 이한의 유일한 희망이자 저주였다.
“또 한 칸이군.”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지도에 그려진 점 하나를 지나쳤다는 표식이었다. 일주일째였다. 잿빛 황무지를 헤매며 그는 오직 한 곳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세상이 망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고대의 지하 유적. 사람들은 그곳을 ‘심층부’라 불렀다. 그리고 그 심층부에는 인류가 잊어버린 모든 지식과 힘이 잠들어 있다고 믿었다. 혹은, 전혀 다른 무언가가.
문득, 스캐너가 삐빅거리며 반응했다. 이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람에 깎인 바위산들이 듬성듬성 솟아 있는 황량한 지형이었다. 위험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스캐너는 가까운 곳에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자세를 낮추고,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이내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변이체 무리였다. 갈라진 피부와 비정상적으로 길게 뻗은 팔다리를 가진 짐승들. 원래는 개였던 것 같았으나, 이제는 그 어떤 생물에도 속하지 않는 끔찍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네 마리. 작은 무리였지만, 이한 혼자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특히 저놈들의 끈질긴 추격 능력은 악명 높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그의 표정은 냉정했다. 배낭에서 작은 금속 구슬을 꺼냈다. 즉석에서 만든 음파 교란 장치였다. 스위치를 누르자, 구슬에서 찌르르륵거리는 불쾌한 고주파음이 뿜어져 나왔다. 변이체 무리는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해, 이한은 반대편 바위산 쪽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폐허의 잔해가 얽히고설킨 좁은 통로들을 헤치며 그는 속도를 냈다. 변이체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가슴이 터질 듯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들이 다시 추격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는 한참을 더 내달렸다.
해 질 녘, 잿빛 하늘마저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에야 이한은 겨우 목적지에 다다랐다. 지도의 마지막 표식이 가리키는 곳. 그곳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거대한 암석 더미에 가려진 은밀한 곳이었다. 아무도 찾지 못했을 법한, 완벽한 은신처. 이한은 지도를 다시 펼쳐보았다. 아버지의 필체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찾아라. 그곳에 모든 해답이 있다.’
그는 암석 더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좁고 어두운 틈을 한참 기어 들어갔을까. 시야가 갑자기 넓어지며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의 중심에, 이한의 눈을 사로잡는 존재가 있었다.
거대한 금속 문.
표면은 오래된 녹으로 뒤덮여 있었고,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문의 크기는 족히 10미터는 넘어 보였다. 이 세상의 어떤 기술로도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문에 손을 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손끝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스캐너를 꺼내 문에 가져다 댔다. 삐비빅, 삐비비빅. 강렬한 신호음이 울렸다. 기존에 보던 어떤 물질과도 다른, 정체불명의 에너지가 문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이거였군.”
이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많은 밤을 꿈꾸고, 수많은 낮을 헤매며 찾아 헤맸던 바로 그곳. 심층부의 입구.
그는 문 옆에 희미하게 박혀 있는 패널을 발견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패널. 지친 손가락으로 패널의 표면을 쓸어보니, 손때 묻은 부분이 만져졌다. 마치 누군가 수없이 눌렀던 것처럼. 이한은 조심스럽게 패널을 눌렀다.
치이이잉-!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기계가 깨어나는 듯한 굉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먼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고, 이한은 팔로 얼굴을 가렸다. 녹슨 철근이 갈리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한참 동안 계속되더니, 이내 거대한 금속 문이 서서히 안쪽으로 밀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어둠이 스며 나왔다. 그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어둠이 아니었다. 수많은 시간과 비밀을 머금은 듯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이한은 떨리는 손으로 스캐너를 꽉 쥐었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기운이 그의 심장을 더욱 거세게 때렸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오랫동안 갈망했던 해답에 대한 기대감이 뒤섞였다.
그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거대한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리며, 이한은 완벽한 고립 속으로 들어섰다. 스캐너의 액정만이 희미한 빛을 발하며, 그의 앞길을 안내하려는 듯 깜빡였다.
“아버지… 제가 왔어요.”
이한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거대한 어둠 속에 흡수되어, 메아리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제 그는 혼자였다. 잊혀진 고대 유적의 심장부에서, 세상이 잊어버린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과연 그 어둠 속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희망일까, 아니면 더 깊은 절망일까.
그의 발소리가 미지의 지하 통로를 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