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숨통
강하늘은 익숙한 어둠 속을 걸었다. 머리 위로는 잿빛 금속이 뒤엉킨 거대한 구조물들이 하늘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고, 그 틈새로 겨우 비집고 들어오는 희미한 인공광만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줄였다 했다. 공기는 늘 그랬듯 눅진하고 무거웠다. 저층 섹터의 만성적인 공기 정화 시스템 고장은 이제 일상이었다. 폐허 같은 건물들 사이로 낡은 환풍구가 ‘웅-’ 하는 마른 소리를 토해냈지만, 그 소음은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는 어깨에 멘 툴킷의 무게를 느끼며 비좁은 골목을 지났다. 매일같이 수십 번 오가는 길이었다. 녹슨 철제 계단을 오르고, 전선이 엉망으로 널브러진 통로를 지나면, 그의 보금자리가 나타났다. 허름한 구역 7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 그러나 그에게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오빠, 왔어?”
문을 열자마자 어린 동생, 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섯 평 남짓한 공간에 놓인 낡은 간이 침대 위에서 은하가 흐릿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이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했고, 마른 기침 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그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응, 왔어. 괜찮아? 기침이 더 심해진 것 같은데.”
하늘은 툴킷을 내려놓고 은하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뜨거웠다. 그는 주름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구역 7의 공기 정화 시스템은 지난주부터 심각한 과부하 상태였다. 어제 겨우 응급처치를 해두었지만, 핵심 부품이 닳아버린 탓에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근본적인 수리가 필요했고, 그러려면 제국에서 공급하는 오리지널 부품이 필수였다.
“오빠, 나… 숨쉬기가 힘들어.”
은하가 얇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어린 나이에 제국의 유독한 대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차 약해지는 동생을 볼 때마다 하늘은 무력감에 치를 떨었다. 아르카디아 제국의 의학 기술은 신의 영역에 닿아 있었지만, 그 축복은 오직 제국의 고위층과 상층민들에게만 허락된 사치였다. 하층민들은 그저 병들어 죽거나, 스스로 버텨내야 했다.
하늘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은하야. 오빠가 내일 꼭 고쳐줄게. 어제도 말했잖아.”
은하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눈빛에는 이미 희망보다 체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은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음 날 새벽, 해가 뜨기도 전에 하늘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구역 7을 벗어나 상층 섹터와 하층 섹터의 경계에 위치한 제국 물품 보급소였다. 그곳은 하층민들에게 제국의 ‘자비’를 베푸는 유일한 창구였고, 동시에 철저한 통제와 감시의 상징이기도 했다.
보급소 앞에는 이미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모두들 얼굴에 피로와 절박함을 매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어제 함께 공기 정화 시스템을 고치던 동료, 지훈도 보였다. 지훈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하늘이! 왔냐? 일찍 왔네.”
“은하 때문에. 어제 밤새 기침이 심했어. 시스템 핵심 부품 교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하늘이 낮게 읊조렸다.
지훈이 혀를 찼다. “쯧쯧. 그 빌어먹을 제국 놈들이 제때 부품만 공급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또 얼마나 뜯어낼지 궁금하다.”
그들의 대화는 뚝 끊겼다. 줄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보급소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철제 문 옆으로는 제국 병사들이 번쩍이는 위압적인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거만하게 아래를 훑었고, 손에 들린 에너지 소총은 언제든 발사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드디어 그의 차례가 왔다. 하늘은 유리창 너머에 앉아 있는 제국 직원에게 다가갔다. 직원은 짙은 푸른색 제복을 입고 있었고, 콧대 높은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무슨 일인가, 구역 7.” 직원이 짧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루함과 경멸이 섞여 있었다.
“구역 7 공기 재순환 장치, 에테르 코어 밸브가 필요합니다. 모델 명은—”
“알고 있다.” 직원은 손짓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코어 밸브. 품절이다.”
하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품절이요? 하지만… 어제 확인했을 때는 재고가 있다고—”
“어제가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다. 품절이다. 정 필요하면 주문해라. 배송까지 최소 삼 개월 걸릴 것이다. 특별 주문은… 비용이 만만치 않겠지.” 직원은 그의 얼굴을 비웃듯이 훑었다. “너희 구역 7이 그만한 돈이 있을 리 없을 텐데.”
하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삼 개월? 은하는 그 시간 동안 버틸 수 없었다. 특별 주문 비용은… 그의 평생을 털어도 감당할 수 없을 금액일 터였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발… 재고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저번 달에도 구역 5에서 같은 부품을 받아갔다고 들었습니다. 은하가… 제 동생이 아픕니다. 이대로는—”
“네 동생이 아픈 게 내 알 바인가?” 직원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규칙은 규칙이다. 하층민의 질병은 제국의 관심사가 아니다. 당장 물러나라. 다음!”
그의 뒤에 서 있던 제국 병사가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바닥을 ‘쾅’ 하고 내리찍었다. 위협적인 소리가 보급소 안에 울렸다. 하늘은 다른 하층민들의 따가운 시선과 함께 뒤로 밀려났다. 모멸감과 분노가 피를 거꾸로 솟게 했다.
그는 보급소 밖으로 밀려났다. 잿빛 하늘 아래, 그에게 허락된 것은 냉랭한 공기와 시퍼런 좌절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저절로 고개를 들었다. 보급소 지붕 위, 수백 미터 상공에는 제국의 상징인 거대한 홀로그램이 빛나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거대한 제국의 문장, 그리고 그 아래 흐르는 황제의 선언문.
*‘우리는 아르카디아의 영광스러운 후예. 만 백성에게 평화와 번영을 약속한다.’*
그 문장은 지금, 그가 서 있는 이 잿빛 지옥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평화와 번영? 누군가에게는 약속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잔인한 농담이었다.
그때, 저 멀리 상층 섹터에서 번쩍이는 순찰선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날아갔다. 세련된 은빛 기체는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러웠고, 그 안에서 웃고 떠드는 상층민들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들은 그들이 누리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 하층 섹터의 고통을 알지도 못한다는 듯 유유히 사라져갔다.
하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거친 작업으로 굳은살이 박히고 상처투성이인 손. 이 손으로 그는 매일같이 녹슨 기계들을 고쳤다. 부서진 것을 이어붙이고, 멈춰버린 것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깨달았다. 진짜 문제는 기계가 아니었다. 썩어버린 것은 시스템이었고, 멈춰버린 것은 제국의 심장이었다. 이 손으로는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 잿빛 하늘을 꿰뚫는듯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절망의 끝에서 솟아난 분노는 차갑게 식어 단단한 결심이 되었다.
*고칠 수 없다면, 부숴야지.*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잿빛 대기 속으로 희미한 핏빛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