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흩날리는 한적한 산자락, 해발 천 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고색창연한 망루에는 언제나 희미한 등불만이 홀로 빛나고 있었다. 사방은 적막했고, 오직 바람 소리만이 묵직한 망루의 벽을 때리며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망루의 가장 깊숙한 곳, 수많은 고서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는 장서고에서, 유련은 낡은 탁상에 기대어 밤낮없이 두루마리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잿빛이었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젊고 청초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깊은 고뇌가 그의 미간에 새겨져 있었다.
유련은 한때 서해(西海)의 명문 선문(仙門)인 ‘청하문(淸河門)’의 촉망받는 제자였다. 그러나 불과 몇 해 전, 문파를 휩쓴 기이한 역병과 함께 그의 스승과 동문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나갔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만이 이 외딴 망루에 유폐되듯 머물고 있었다. 문파의 몰락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혹은 언젠가 기적적으로 부활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그는 고대 문헌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헤맸다.
“이것은…”
수백 번도 더 들춰보았던 고문헌 더미 속에서, 유련의 손끝에 닿은 것은 낡고 기이한 문양의 목판이었다. 목판은 일반적인 장서들과는 달리 두꺼운 비단 천에 싸여 탁자 밑 숨겨진 공간에 놓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목판을 꺼내 먼지를 털어냈다. 어둡고 거친 나무결 위에는 이제는 사라진 고대 문명이 사용했을 법한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즉시 망루의 한쪽에 놓인 거대한 석판을 향해 걸어갔다. 석판에는 청하문의 역대 조상들이 남긴 수많은 비문과 주석들이 새겨져 있었다. 유련은 석판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판의 문양과 석판의 비문을 하나하나 대조하기 시작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판의 상형문자와 석판의 한 귀퉁이에 희미하게 새겨진 주석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자, 그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목판은 단순히 고대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길이었다. 잊혀진 문명, 혹은 전설 속에서나 존재한다는 지저도시 ‘나선 심연(螺旋深淵)’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지도가 새겨져 있었다.
석판의 주석에 따르면, ‘나선 심연’은 세상의 영기가 시작된 곳이자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이라고 했다. 그곳에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숨겨져 있으며, 동시에 파멸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청하문의 조상 중 한 명이 우연히 이 목판을 발견하고 주석을 남겼지만, 그 위험성에 경고하며 누구도 그곳을 찾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유련에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문파의 몰락, 스승의 죽음, 그의 오랜 고뇌는 그를 두려움 없이 만들었다. 오히려 그는 끓어오르는 열망을 느꼈다. 어쩌면 그 ‘나선 심연’ 속에 청하문의 역병을 치료하고 문파를 재건할 수 있는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나선 심연… 과연 그곳에 답이 있을까.”
유련은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이미 심연의 끝을 응시하는 듯 깊고 멀어졌다. 그는 목판을 조심스럽게 품에 넣고 망루의 낡은 지도를 펼쳤다. 지도의 한 귀퉁이, 세상의 끝자락이라 불리는 ‘흑룡산맥(黑龍山脈)’의 가장 깊은 골짜기가 목판이 가리키는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흑룡산맥은 영기가 희박하고 기이한 마수들이 출몰하여 수련자들도 발길을 끊은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유련은 창백한 손으로 등불을 들어 올렸다. 춤추듯 흔들리는 등불의 빛은 그의 그림자를 벽에 길게 드리웠다. 그는 굳게 다문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나는 간다. 스승님의 뜻을 따라서, 청하문의 마지막 희망을 찾아서.”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는 천둥처럼 거대했다. 밤새도록 짐을 꾸린 유련은 다음 날 새벽, 아직 동이 트기도 전에 망루의 문을 열었다. 매서운 눈보라가 그의 얼굴을 때렸지만,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가운 설원 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뒤로 망루의 등불은 점점 멀어져, 이내 어둠 속에 삼켜졌다. 이제 그의 앞에는 오직 미지의 흑룡산맥과 그 아래 잠들어 있을지 모를 ‘나선 심연’만이 남아 있었다.
그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