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고가도로의 그림자
머리 위로 늘어진 고가도로는 한때 수많은 차량의 굉음을 삼켰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잿빛 하늘을 가르는 거대한 흉터처럼 존재할 뿐이었다. 갈라진 콘크리트 틈새로 끈질긴 덩굴 식물들이 기어오르고, 녹슨 철근들은 살갗을 찢어 발기려는 짐승의 발톱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지우는 축축한 그림자 속을 조심스럽게 헤치며 움직였다. 낡은 방진 마스크 너머로 내쉬는 숨이 뿌옇게 서렸다. 사방은 먼지와 폐허 냄새, 그리고 어딘가 축축하고 비릿한 흙냄새가 뒤섞여 났다.
“젠장, 또 꽝이네.”
낮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오래전 지도 앱에 표시되어 있던 ‘식료품점’이라는 글자는 희미하게 지워진 지 오래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렀던 건물은 이미 온통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이라곤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조각과 곰팡이 핀 포장지들뿐. 썩어버린 캔을 발로 툭 차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녹물이 흘러나왔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졌다. 어둑해지는 도시의 실루엣은 더욱 음산하게 느껴졌다. 지우는 어깨에 멘 낡은 배낭의 무게를 고쳐 맸다. 오늘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면, 내일 아침은 또다시 말라비틀어진 건빵 몇 조각으로 때워야 할 터였다.
그때였다. 고가도로 아래, 한때 번화했을 대로변이었다고 짐작되는 곳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지우는 보았다. 마치 오래된 신호등이 마지막 힘을 다해 깜빡이는 것처럼 불규칙적이었다. 하지만 저 빛은 신호등이 아니었다. 너무 낮았고, 너무 불안정했다.
지우의 심장이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뛰었다. 저런 빛은 주로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는 지우처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다른 생존자. 다른 하나는… 이 폐허 속에서 인간의 흔적을 쫓는 굶주린 짐승들.
배낭 옆에 단 칼집에서 묵직한 나이프를 꺼냈다. 손에 익숙한 무게감이 작은 위안을 주었다.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몸을 낮춘 지우는, 발밑의 자갈 하나까지 신경 쓰며 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향했다. 썩어가는 상가 건물들 사이, 툭 튀어나온 간판의 잔해가 거센 바람에 ‘삐거덕, 삐거덕’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소리에 맞춰 심장이 더욱 빠르게 쿵쿵거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낡은 공구상가였다. 유리창은 깨져 있었고, 내부에는 어둠과 함께 희미한 기름 냄새가 감돌았다. 빛은 건물 안쪽, 깊숙한 곳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지우는 깨진 유리창 틈새로 몸을 구겨 넣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자,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이 위험한 소리를 냈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미세한 움직임, 낮은 신음, 혹은 흐느낌 같은 것이 들렸다. 인간의 소리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거기 누구… 있어?”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울리는 것 같아 지우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이 낡은 건물에서는 모든 소리가 증폭되는 듯했다. 인기척을 들은 것일까? 빛이 잠시 흐려지더니 이내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발소리가 들렸다. 느릿느릿,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
지우는 벽에 바싹 몸을 붙였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콘크리트의 감촉.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졌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이내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몸은 어딘가 뒤틀려 있었고, 한쪽 팔은 기형적으로 부풀어 있었으며,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섬뜩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눈은 광기 어린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입에서는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돌연변이. 지우는 숨을 들이켰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대였다.
그 괴물은 어둠 속에서 주위를 훑는 듯했다. 빛이 나는 손전등을 들고 있었는데, 그 빛이 지우의 은신처를 스쳐 지나갔다. 지우는 돌처럼 굳었다. 들키면 끝이었다. 저런 것들은 인간의 흔적을 끈질기게 쫓았고,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았다.
괴물이 손전등을 더듬거리며 아래로 내렸다. 그 빛은 바닥에 놓인 낡은 공구 상자를 비췄다. 상자 안에는… 녹슨 스패너와 렌치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작고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한때 이 세계를 지탱했던 문명의 잔해, 그러나 이 황폐해진 세상에서는 가장 귀한 보물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배터리 팩’. 그것도 아직 전기가 조금 남아 있는 새것에 가까운 배터리 팩이었다.
괴물이 배터리 팩을 발견하고 으르렁거렸다. 저 짐승이 전기를 알아볼 리는 없었다. 아마 그저 반짝이는 물건에 흥미를 보인 것일 터. 괴물이 느릿하게 몸을 숙여 배터리 팩을 집어 들려는 순간, 지우의 뇌리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스쳤다.
‘저건 가져야 해.’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지우는 벽에서 뛰쳐나왔다. 거의 동시에, 나이프를 쥔 손이 괴물의 부풀어 오른 팔을 향해 뻗어 나갔다. ‘쉬이익!’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괴물의 피부를 깊숙이 갈랐다.
“크으으윽!”
괴물의 입에서 인간의 언어가 아닌 짐승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손전등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고, 공구상가 안은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했다. 지우는 떨어진 배터리 팩을 재빨리 주워 들었다. 손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하지만 괴물은 지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랐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팔이 지우의 다리를 후려쳤다. ‘퍽!’ 둔탁한 충격과 함께 지우는 옆으로 고꾸라졌다. 통증이 몰려왔지만, 이빨을 악물고 버텼다.
“이 빌어먹을 자식!”
지우는 고통을 참으며 허우적거렸다. 괴물이 또다시 공격해오려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다리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삐었거나 근육이 손상된 것 같았다.
괴물의 숨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우는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배터리 팩은 꽉 움켜쥐었다. 이것만은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건물 바깥으로 통하는 깨진 유리창이 저 멀리 보였다. 저곳까지 갈 수 있을까?
“크르르르르…”
괴물의 손이 지우의 발목을 덮쳤다. 끈적하고 차가운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괴력으로 지우를 끌어당기는 힘에, 지우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이제 끝인가?
그때, 저 멀리 도시의 폐허에서 ‘쿠우우우웅!’ 하는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에 괴물이 잠시 움찔했다. 붙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느슨해졌다.
지우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모든 힘을 쥐어짜 발목을 빼내고, 남은 한 발로 바닥을 차며 몸을 내던졌다. 유리창 밖으로 몸이 굴러 떨어지며, 찢겨진 옷자락과 함께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지우는 고통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뒤에서 괴물의 격분한 포효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아까의 굉음에 묻혀 희미하게 들렸다.
도시 저편에서, 붉은 빛이 하늘로 치솟았다. 화염과 함께 솟아오른 거대한 기둥은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불길하게 빛났다. 그것은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 이 황폐한 세계에서, 지우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전례 없는 규모의 재앙이었다.
“젠장… 저게 또 뭐야…”
지우는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가까스로 주워든 배터리 팩을 꽉 쥔 채, 부서진 다리를 끌며 필사적으로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거대한 잿빛 고가도로는 이제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니었다. 새로운 그림자가,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