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이 세상은 죽은 자들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저 시체들의 잔치를 지켜보는 들러리일 뿐이었다. 나는 그 들러리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역할을 맡은 존재였다. 적어도, 태우가 나를 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훈아, 괜찮아? 너 다쳤잖아!”

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이미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무너진 백화점 잔해 속에서 겨우 몸을 움직여 피투성이가 된 다리를 부여잡았다. 창밖으로는 수백, 수천 마리의 ‘그것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악취와 함께 들려오는 끔찍한 울음소리가 현실의 무게를 더했다.

“나… 난 괜찮아. 다리만 좀 삐끗한 것 같아. 태우야, 출구가 어디지? 어서 나가야 해!”

내 말에 태우는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의 식량과 물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고, 이곳 백화점에서 마지막 희망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썩어가는 시체 덩어리들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젠장, 저쪽은 이미 막혔고… 이쪽도 글렀어. 지훈아, 저 환기구밖에 없어. 하지만 너무 작아서 한 명밖에 못 들어가.”

태우가 가리킨 곳은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기어갈 만한 좁은 통로였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바로 뒤편 주차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끔찍한 소용돌이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

“그럼 네가 먼저 가. 난 다리가 이러니, 네가 먼저 가서 놈들을 따돌리면 내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태우가 내 어깨를 꽉 잡았다. 그의 눈에는 익숙한 불안감과 함께 낯선 냉기가 서려 있었다.

“지훈아, 정신 차려! 지금은 누가 누구를 기다릴 때가 아니야. 내가 먼저 들어가서 자리를 잡아야 해. 넌 나보다 몸집이 작으니, 혹시라도 놈들이 쫓아오면 뒤따라와야 해. 알았지?”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우리는 십 년 지기 친구였다. 태어날 때부터 붙어 다녔고, 어려운 순간마다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가 먼저 앞장서서 길을 뚫어주겠다고? 고마운 마음과 함께 안도감이 밀려왔다.

“알았어, 태우야. 조심해. 난 꼭 뒤따라갈게!”

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망설임 없이 환기구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좁은 통로 속에서 그의 등은 점차 멀어져 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부러진 다리를 끌며 그를 따라가려 했다. 그런데, 통로 안에서 무언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금속판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태… 태우야? 뭐 하는 거야? 문 열어! 문 열라고!”

내가 부르짖어도 대답은 없었다. 환기구 저편에서 태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미안하다, 지훈아. 미안해… 나라도 살아야 해. 나라도 살아야 하잖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내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배신. 완벽한 배신이었다. 그 순간, 나는 태우가 아니라 내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것은 놈들의 끔찍한 울음소리에 삼켜졌다. 환기구 뒤편에서 ‘그것들’이 쿵, 쿵, 하고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날, 나는 살았다. 기적적으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내 마음속에는 태우를 향한 증오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증오가 나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 되었다.

나는 죽지 않았다. 죽지 못했다. 태우가 준 절망 속에서, 나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더 이상 겁쟁이 지훈이가 아니었다. 나는 망가진 세상을 찢어발기는 포식자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복수하기 위해.

“흐읍… 읍…”

숨을 죽이고 쓰러진 폐건물 잔해 속에 몸을 숨겼다. 손에 쥔 낡은 칼날이 차갑게 번득였다. 놈들을 죽이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 소리를 듣고 달려드는 녀석들의 목을 베고, 머리를 부수고, 시체를 밟고 나아갔다. 수많은 밤을 그렇게 보냈다. 놈들의 시체를 벗겨 먹고, 빗물을 받아 마시며 생존했다.

몇 달, 아니 몇 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점점 더 강해졌고, 점점 더 무감각해졌다. 하지만 태우를 향한 증오만은 더 선명해졌다. 그의 얼굴이, 그의 목소리가, 그리고 그가 나를 버리던 순간의 차가운 눈빛이 밤마다 나를 괴롭혔다.

소문은 점차 퍼져나갔다. 이 폐허가 된 도시에도 생존자들의 거점들이 생겨났다는 소문이. 그리고 그 소문 속에서, 나는 한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태우. 그는 살아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작은 생존자 집단의 리더가 되어 있었다.

“그 자식이… 놈들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그리고 리더가 되었다고?”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비웃음은 이내 짐승의 으르렁거림으로 변했다. 비참한 나는 죽음의 문턱을 수도 없이 넘나들며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살았는데, 그 자식은 편안히 살아남아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니. 역겨웠다. 토할 것 같았다.

나는 미친 듯이 태우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낡은 지도를 구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합하며 그의 거점을 찾아냈다. 놈들이 득실거리는 폐허를 가로지르고, 때로는 놈들과 피투성이 싸움을 벌여가면서 말이다.

마침내, 나는 태우가 이끄는 거점에 도착했다. 허술해 보였지만 꽤 견고한 방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동체였다. 나는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잠입했다. 나의 목적은 오직 하나, 태우.

밤이 깊어지고, 거점은 잠잠해졌다. 나는 낡은 건물 안으로 숨어들어 태우의 거처를 찾아 헤맸다. 곧,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을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문틈으로 안을 엿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태우…”

내 입에서 이름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는 낡은 침대 위에 앉아 다른 생존자들과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편안해 보였다. 그의 옆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다정하게 기대어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내 속에서는 시뻘건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나는 분노를 억누르고 한참을 기다렸다. 모두가 잠들고, 태우와 여인만이 남았을 때였다. 여인이 잠이 들자, 태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창밖을 내다봤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손은 차분했다. 목덜미에 차가운 칼날이 닿자, 태우의 몸이 움찔했다.

“누… 누구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예전처럼 침착하고 당당했던 태우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칼날을 그의 목에 살짝 더 깊이 밀어 넣었다. 피 한 줄기가 그의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흐읍… 살려줘… 부탁이야… 누구든 상관없어. 원하는 게 뭐야? 식량? 물? 아니면… 보급품? 다 줄게!”

그는 애원했다. 비굴한 그의 모습에 나는 역겨움을 느꼈다. 과거의 나와 너무나도 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나약한 내가 아니었다.

“원하는 것… 궁금해?”

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내 목소리는 차갑고 메말라 있었다. 태우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 그 목소리… 설마… 지훈이…?”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창밖의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공포와 충격이 뒤섞인 그의 표정. 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날 버리고 살았으니… 좋았겠지, 태우야?”

나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칼날은 그의 목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니… 아니야! 지훈아, 오해야! 난 그때 정말 어쩔 수 없었어! 놈들이 들이닥쳤고, 네가 다쳤으니…”

“그래서 버렸나? 십 년 지기 친구를? 나라도 살아야 한다고? 그래, 그 말…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해.”

내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차가운 지옥의 웃음이었다.

“지훈아! 제발! 용서해 줘! 내가 정말 잘못했어! 내가 평생 너한테 보상할게!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제발!”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옆에서 잠들었던 여인이 부스럭거리며 깨어나려 했다. 나는 재빨리 칼을 빼들고 태우의 옆구리를 깊숙이 찔렀다.

“크악!”

피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인이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공포가 가득했다.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태우를 노려봤다.

“보상? 너는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어, 태우야. 내 친구를, 내 믿음을, 그리고 내가 살아갈 이유마저도. 내가 버려진 그 지옥에서, 나는 매일 밤 네 얼굴을 떠올리며 버텼어. 너를 찾아내서 똑같이 갚아주겠다고 맹세하면서 말이야.”

나는 태우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그의 눈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네가 편안히 잠들고, 웃고 떠드는 동안, 나는 썩어가는 시체들 사이에서 너를 저주했어. 이제 그 저주를 돌려받을 시간이야.”

나는 칼날을 높이 치켜들었다. 태우의 눈이 마지막으로 나를 향했다. 그 눈에는 이제는 절망과 함께, 뒤늦은 후회가 서려 있었다.

“지훈… 아… 미안… 해…”

그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나는 망설임 없이 칼날을 내리꽂았다. 피가 튀었고, 뜨거운 피가 내 얼굴에 닿았다. 더 이상 증오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공허함만이 남았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복수를 이뤘는데, 왜 이리 허무할까.

나는 죽어가는 태우의 몸을 바라봤다. 그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그의 곁을 떠나기 전, 잠시 멈춰 서서 그의 옆에 있던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충격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칼을 겨누지 않았다. 나의 복수는 오직 태우에게 향해 있었으니까.

나는 피 묻은 칼을 쥔 채, 아무도 모르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놈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의 복수는 끝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죽은 세상에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혼자일 것이었다. 나의 길은 이제 어디로 향하는가. 나는 답을 알지 못했다. 그저, 이 밤의 공허함 속에서 나의 발걸음만이 다음 미지의 길을 향해 움직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