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한 햇살이 유리창을 투과해 들어왔다. 먼지 한 톨 없는 마룻바닥 위에 오후의 금빛이 잔잔하게 부서졌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원목 테이블 위에는 갓 피어난 여린 들꽃 몇 송이가 꽂힌 작은 화병이 놓여 있었다. 뽀얗게 김이 오르는 잔에는 은은한 향이 감돌았다. 이곳, ‘고요한 수면’은 마치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듯한 평온한 공간이었다. 나는 잔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바라보며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후우…”
완벽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이름 앞에는 ‘망가진, 부서진, 폐허가 된’ 같은 수식어가 늘 따라붙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람들은 내 작은 작업실 겸 찻집을 ‘치유의 공간’이라 불렀다. 상처받은 이들이 찾아와 따뜻한 차 한 잔에 위안을 얻고, 내가 가르치는 종이 공예 수업에서 집중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고 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한층 더 단단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일 테다.
사실이었다. 나는 단단해졌고, 이제는 어떤 것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특히, 다시는.
“계세요?”
찰랑, 문에 달린 작은 풍경이 청아한 소리를 냈다. 나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 있는 익숙한 그림자를 보는 순간,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모든 감각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일렁였다.
서연이었다.
여전히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메이크업, 유행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자신만의 고급스러움을 잃지 않는 옷차림. 변한 게 없었다. 내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동안, 저 아이는 그 틈을 비집고 자신의 왕국을 더욱 견고히 쌓아 올렸겠지.
“어머, 서연아. 네가 여긴 어떻게….”
나는 깜짝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물론, 놀라움은 연기였다. 나는 서연이 오늘 이 시간, 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젯밤, 서연이 즐겨 찾던 카페의 바리스타가 내게 슬쩍 흘린 정보였다. 서연이 최근 내 이야기를 종종 묻고, 특히 이곳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그 바리스타도, 서연도 몰랐겠지만, 그는 내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는 작은 말에 불과했다.
서연은 멋쩍은 듯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곧 이 평화로운 공간에 안심하는 듯했다. 마치 내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그저 과거의 흔적처럼 느껴지는 걸 즐기는 눈치였다.
“미나야… 정말 너 맞아? 소문만 듣고 설마 했는데… 분위기가 너무 좋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들떠 있었다. 하지만 내 귀에는 미묘한 동정심과 우월감이 섞여 들렸다.
“응, 맞아.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앉아. 뭐 마실래? 네가 좋아하는 캐모마일 블렌딩도 새로 만들었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그녀의 눈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내가 과거의 상처에서 완벽하게 회복한 것을 확인하려는 듯, 혹은 나를 통해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씻어내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캐모마일… 좋아. 괜찮다면 미나 네가 직접 만든 걸로.”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향했다. 뒤돌아선 순간, 내 얼굴에서 모든 미소가 사라졌다. 거울 속 나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
캐모마일 블렌딩. 그래, 네가 가장 좋아하는 차였지. 불면증에 시달리던 네가 이 차를 마셔야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며 늘 내게 만들어달라고 졸랐던. 그래서 내가 수없이 많은 허브를 연구하고 조합해서 결국 너만을 위한 레시피를 만들어냈던.
그 레시피는… 지금도 내 손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비법이 추가되었을 뿐.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찻잎을 덜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향긋한 증기가 피어 올랐다. 그 안에 아주 미량의, 하지만 꽤나 특별한 약초를 첨가했다. 티스푼으로 휘휘 저어 녹여낸 후, 다시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장착하고 서연에게로 돌아섰다.
“여기. 뜨거우니까 조심해.”
나는 찻잔을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 서연은 찻잔에서 피어나는 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향이 그녀의 후각을 자극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잊고 있던 옛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미소가 어렸다.
“정말 오랜만이다, 미나 네가 만들어준 차 마시는 거.”
“그러게.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변함없이 차를 음미했고, 그 차가 주는 편안함에 금세 표정이 누그러졌다. 눈가의 미세한 떨림도 사라졌다.
“미나야, 그때 일은… 정말 미안했어.”
서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정말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 세상이 통째로 뒤집혔던 그날, 모든 것을 잃고 폐인이 되어가던 나를 버리고 떠났던 그녀는, 이제 와서 사과라는 단어로 모든 것을 덮으려 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이야, 서연아. 다 지난 일인데. 나도 이제 괜찮아. 이렇게 내 가게도 열고, 사람들한테 종이 공예도 가르치고. 오히려 그때 그 일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든 것 같아.”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거짓말을 했다. 내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고, 내 목소리는 진심으로 상처를 극복한 사람처럼 들렸다. 서연은 내 말에 안도하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네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니… 정말 마음이 놓인다. 나도 한동안 죄책감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죄책감?’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네가 힘들었어? 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보며 미소 지었잖아. 내가 발버둥 칠 때, 넌 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섰잖아. 네가 감히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다 과거의 일이지. 우리, 이제 친구잖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얘기는 그만하고, 차나 더 마셔.”
나는 빈 찻잔을 보며 말했다. 서연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게서 완전히 위협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아마도 내가 완전히 부서졌다가 다시 일어선, 그저 평범한 친구로 보일 테다.
나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찻주전자를 들고 왔다. 서연의 찻잔에 조용히 차를 따라주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약효가 더 강한 약초가 소량 더 첨가되었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양이지만, 충분했다.
“미나야, 혹시….” 서연은 찻잔을 들어 올리려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 혹시… 요즘 민 대표님하고 연락해?”
민 대표.
내 세상이 무너지는 데 일조했던 또 한 명의 인물.
서연과 함께 나를 배신하고, 내 모든 것을 가로챘던 남자.
나는 웃었다. 아주 순수하고 해맑은 미소였다.
“민 대표님? 아니. 내가 그럴 일이 뭐가 있어? 이제 다 남남인데. 왜? 무슨 일 있어?”
서연은 나의 반응을 살피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에 미묘한 불안감이 스쳤다.
“아니, 그냥… 요즘 사업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예전 같지 않더라고. 너한테 물어보면 혹시 아는 게 있나 해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는 이제 그쪽 소식에는 통 관심이 없어. 내가 만든 차나 마시면서 평화롭게 살고 싶거든.”
그녀는 내 말에 안심한 듯 다시 차를 홀짝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내가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에 그녀는 조금 더 이완되는 듯 보였다.
그래, 서연아. 평화롭게 살고 싶다니,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 평화는, 이제 네 것이 아니야.
“참, 서연아. 이참에 너도 종이 공예 배워보는 건 어때? 마음이 정말 편안해진다니까. 요즘 내가 특별히 만드는 게 있는데…”
나는 테이블 한편에 놓인, 이제 막 형태를 갖춰가는 종이 작품을 가리켰다. 연약하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운, 마치 피어나는 꽃잎 같은 모양이었다.
“이걸, 하나하나 정성껏 붙이다 보면, 잡념도 사라지고… 스트레스도 풀리고. 정말 좋아.”
서연은 흥미로운 듯 작품을 들여다보았다.
“어머, 정말 예쁘다. 미나, 네 솜씨는 여전하네.”
“나중에 오면 내가 특별히 하나 만들어줄게. 너만을 위한 걸로. 아니면, 직접 만들어보는 것도 재밌을 거야.”
나는 친근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종이 공예 체험을 권유했다. 그녀는 내 제안이 나쁘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나야. 다음에 꼭 다시 올게. 오늘 차도 고맙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서연은 문을 열고 나서며, 마치 미처 못다 한 말이 있는 것처럼 잠시 뒤돌아섰다.
“미나야, 너 정말… 잘 된 것 같아서 다행이야. 정말 진심으로.”
그녀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들렸다. 그녀는 내가 무너졌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보란 듯이 일어서서 평화롭게 사는 내 모습에, 진심으로 안도하는 듯 보였다. 그녀의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덜어진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서연아. 고마워. 너도… 잘 지내.”
그녀는 나를 향해 마지막 미소를 짓고는 문을 닫았다. 찰랑, 풍경이 다시 한 번 청아하게 울렸다.
고요한 적막이 다시 공간을 채웠다.
나는 빈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내 손가락 끝에 닿는 종이 작품의 섬세한 꽃잎은, 내 눈에는 마치 맹독을 머금은 독초의 잎사귀처럼 느껴졌다.
잘 지내라니, 물론이지.
이제부터 네 삶은, 내가 정성껏 다듬어준 대로 움직이게 될 테니까.
네가 편안하게 마신 그 차는, 네가 나를 배신한 대가로 치르게 될 작은 시작에 불과해.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겠지.
내 복수는,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가장 평화롭고, 가장 치유적인 방법으로.
조용하고, 고통스럽게.
매일매일, 네 삶을 조금씩, 조금씩, 망가뜨릴 거야.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마치, 네가 평온하게 차를 마시는 동안 네 몸속에서 약효가 퍼져나가듯.
나는 다시 찻잔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향긋하고, 따뜻하며, 치유하는 듯한…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을 무너뜨릴 독이었다.
완벽해.
오늘도, 나의 하루는 완벽하게 시작되었다.
서연, 이제 네 차례야.
네가 그토록 나를 동정하며 지켜보던 그 힐링이, 곧 너의 지옥이 될 테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