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섬광처럼 눈앞이 번뜩였다. 거대한 경기장은 깊은 숨을 들이켜듯 일순간 고요에 잠겼고, 수만 개의 시선이 한 점에 박혔다. 결승 무대 위에 선 두 그림자. 한쪽은 핏빛 아우라를 두른 듯 섬뜩한 기운을 내뿜는 묵직한 거한, 천마 묵강. 다른 한쪽은 그의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질 듯 왜소해 보이는,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눈빛을 지닌 청년, 류제하.

“드디어… 결승이군요.”

심판장의 쉰 목소리가 공허한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환희보다는 알 수 없는 비장함이 짙게 깔려 있었다. 천하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대결. 승리하는 자의 손에 모든 것이 쥐어질 터였다.

류제하는 묵강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묵강의 눈은 깊은 심연 같았다. 그 안에는 일말의 감정도 없이 오직 파괴에 대한 갈망만이 번뜩이는 듯했다. 그의 어깨를 감싼 흑염(黑炎)의 기운은 마치 살아있는 맹수처럼 꿈틀거렸다.

‘흑염신장….’

류제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묵강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대를 온전히 서 있게 만든 적이 없었다. 그의 흑염신장은 모든 것을 태우고 부수는 절멸의 무공이었다. 수많은 강자들이 그의 손아귀에서 재가 되거나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흥.”

묵강의 입에서 짧은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시선은 류제하를 훑어 내리며 마치 벌레를 보듯 경멸로 가득했다.

“이것이… 천하의 마지막 희망이더냐. 실로 가소롭군.”

묵강의 말이 경기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검은 기운이 깃든 듯, 듣는 이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관중석에서는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이미 싸움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난 것처럼 느껴졌다.

류제하는 묵강의 도발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격렬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동료들의 희생, 스승의 가르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키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 그것들이 그의 두려움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천하의 운명은 그리 가볍지 않습니다.”

류제하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어떤 쇠붙이보다 단단했다. 그의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만뢰검법(萬雷劍法)’. 수십 년 전, 전설 속으로 사라졌던 고대 무문의 비기가 그의 손에서 다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소리! 운명이란, 강자가 만들어 가는 것. 그리고 이 천하의 가장 강한 자는, 바로 나다!”

묵강의 오른팔이 허공을 갈랐다. 콰아앙! 폭풍이 휘몰아치듯 검은 기운이 류제하를 향해 쇄도했다. 거대한 흑염의 파도가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파도가 덮친 자리의 바닥은 녹아내리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류제하는 온몸의 기혈을 역류시키며 필사적으로 피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번개처럼 빠르고 예측 불가능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 피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렸다.

휘잉! 슈아아악!

수십 번의 회피가 이어졌다. 묵강의 공격은 마치 끝없는 파도처럼 몰아쳤고, 류제하는 그 파도 속에서 작은 조약돌처럼 버텨냈다. 그러나 그 조약돌은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피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느냐!”

묵강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짜증이라는 감정이 스쳤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오래 공격을 퍼부은 적이 없었다. 상대는 보통 첫 합에 쓰러지거나 기세를 꺾였다.

류제하는 답하지 않았다. 그의 몸놀림은 더욱 가벼워졌다. 묵강의 흑염이 바닥을 불태우는 순간, 류제하는 그 불길을 뚫고 묵강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었다.

쉬이이익!

허리에 매달린 검집에서 검 한 자루가 뽑혀 나왔다.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은 검신이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빛났다.

‘이것이… 천뢰검!’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직 만뢰검법의 극의를 깨달은 자만이 다룰 수 있다는 전설의 검.

“만뢰검법, 제1식… 낙뢰!”

류제하의 검 끝에서 푸른 기운이 번뜩였다.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듯, 그의 검은 묵강의 어깨를 향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속도는 눈으로 쫓을 수 없을 만큼 빨랐고, 그 기세는 마치 거대한 산이 무너지는 듯했다.

콰아앙!

검과 흑염이 충돌하며 거대한 폭음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검은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그 충격파에 의해 관중석의 일부 좌석이 부서져 나갔다.

“크윽…!”

묵강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어깨에 작은 균열이 생겨 있었다. 흑염신공으로 무장한 그의 육체에 상처를 입힌 것은 류제하가 처음이었다.

“제법이로구나… 작은 벌레가 독니를 숨기고 있었군.”

묵강의 눈이 더욱 흉포하게 번득였다. 그의 전신에서 흑염이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땅바닥이 진동하고 공기가 비명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제 나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마!”

묵강의 양손이 허공을 향해 펼쳐졌다.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회오리치듯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보였다. 경기장 전체의 기(氣)가 묵강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만상흑염진(萬象黑炎陣)!”

묵강의 외침과 함께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온 흑염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이내 거대한 검은 구체를 형성했다. 그 구체는 밤하늘의 심장처럼 어둡고, 모든 빛을 집어삼킬 듯한 위압감을 풍겼다.

‘저것은… 공간마저 비틀어 버리는…!’

류제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저 공격은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왜곡하고, 시전자 주변의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궁극의 파괴기였다.

“이제 끝을 내주마! 천하와 함께 사라져라!”

묵강의 손끝에서 검은 구체가 류제하를 향해 천천히,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류제하의 온몸이 경직되는 듯했다. 피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스승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스쳤다.

_“제하야, 만뢰검법의 진정한 가치는 ‘흐름’에 있느니라. 끊어지지 않는 흐름,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토해내는 흐름.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자, 너의 검이 가야 할 길이다.”_

흐름… 자연의 순리…

류제하는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오직 하나에 집중했다. 거대한 흑염 구체가 다가오는 압력, 뒤틀리는 공간의 비명, 심장을 죄어오는 죽음의 그림자. 그 모든 것을 그는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 안에서 만뢰검법의 기운이 폭주하듯 휘몰아쳤다. 그러나 류제하는 그것을 억누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운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자신을 내맡겼다.

“만뢰검법… 제2식… 회천(回天)!”

류제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검에서 푸른빛이 용솟음쳤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검의 움직임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직선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감싸 안고, 다시 돌려보내는 원형의 흐름이었다.

거대한 흑염 구체가 류제하의 검에 닿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흑염 구체가 터져 나가는 대신,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물방울처럼 류제하의 검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

콰아아앙! 즈으으응…!

두 거대한 힘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기이한 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공간이 울부짖고, 시간이 멈춘 듯했다. 푸른빛과 검은빛이 뒤섞이며 거대한 에너지를 토해냈다.

류제하의 전신에서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의 근육은 한계에 다다랐고, 혈관은 터져 버릴 듯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그는 그 모든 힘을 제어하며, 흑염의 흐름을 자신의 검 끝으로 유도했다.

“이… 이럴 수가…!”

묵강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궁극기가, 필살기가 상대의 검에 의해 무력화되고 있었다. 아니, 무력화를 넘어선 역류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었다.

류제하의 검이 마지막 힘을 짜내며 크게 한 바퀴 회전했다.

“돌려주마… 그대의 절멸을!”

회전하는 검 끝에서 흑염 구체가 묵강을 향해 역으로 날아갔다. 그 속도와 위력은 묵강이 처음 날렸던 것보다 한층 더 강력해져 있었다. 자신의 공격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기이하고도 처절한 상황.

“말도 안 돼…!”

묵강의 얼굴에 처음으로 공포가 스쳤다. 그는 자신의 흑염신공으로 필사적으로 방어막을 쳤지만, 이미 늦었다. 자신의 무공에 담긴 파괴의 힘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의 눈빛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흑염 구체가 묵강의 몸을 덮쳤다. 경기장 전체가 거대한 진동에 휩싸였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고, 그 연기 속에서 묵강의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듯했다.

연기가 걷히자, 묵강이 서 있던 자리에는 깊게 패인 웅덩이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웅덩이 한가운데, 만신창이가 된 묵강의 육체가 쓰러져 있었다. 그의 전신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더 이상 흑염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경기장은 침묵에 잠겼다. 수만 명의 관중들이 숨죽인 채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봤다. 천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천마 묵강이… 쓰러졌다. 그것도 자신의 무공에 의해.

류제하는 검을 바닥에 짚은 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의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그 순간, 심판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승자… 류제하!”

그 외침과 동시에 경기장은 거대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환희와 안도, 그리고 경외심이 뒤섞인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천하의 운명을 건 대결은, 그렇게 류제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류제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승리의 환호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렸다. 묵강이 쓰러졌지만, 그가 가져온 거대한 혼돈의 그림자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불안감에 사로잡힌 채, 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앞에는 또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