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또 아무것도 없어.”
현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낡은 철골 구조물 아래를 더듬었다. 손에 쥐인 것은 녹슨 파이프 조각뿐, 그마저도 쓸모가 없었다. 며칠째였다. 온전히 먹을 만한 것을 찾지 못한 지가. 마른 입술이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는 작은 상처 하나도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머리 위를 덮고 있는 하늘은 언제나처럼 잿빛이었다. 해는 희미한 원형의 빛으로만 존재했고, 가끔 보라색이나 검붉은 구름이 지나가며 괴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대붕괴’ 이후 모든 것이 뒤틀렸다. 땅은 갈라지고, 바다는 검게 오염되었으며,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현우는 신발 밑창이 다 닳아버린 부츠를 질질 끌며 폐허 속을 헤쳐 나갔다. 찢어진 방호복은 더 이상 방호복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등에는 낡은 배낭이 축 늘어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물 한 병과 몇 조각의 딱딱한 건빵, 그리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손에 쥐여주었던 작은 은제 십자가뿐이었다. 십자가는 이미 색이 바랬지만, 현우는 그것을 절대 놓지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군.”
혼잣말이 텅 빈 거리에 울려 퍼졌다. 아무도 들을 이 없는 외로운 목소리였다. 폐허가 된 건물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현우를 덮쳤다. 이곳은 한때 번화했던 상업 지구였을 것이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가고, 간판은 알아볼 수 없는 기호들로 뒤틀려 있었다. 건물 벽에는 섬뜩한 곰팡이들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한때 은행이었던 곳의 금고 문이 뜯겨나간 자리를 지나치며 현우는 침을 삼켰다. 물이 절실했다. 어디선가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곳의 물은 대부분 마실 수 없는 독이었다. 대붕괴 때부터 솟아난 짙은 점액질로 뒤덮여 있거나, 알 수 없는 형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르륵… 척… 스르륵… 척…’
낮게 깔린 마찰음이 귓가를 스쳤다. 현우는 순간 몸을 굳혔다. 익숙지 않은 소리였다. 이 폐허에는 바람 소리와 무너지는 잔해 소리, 그리고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이 소리는… 뭔가 기어가는 소리 같았다.
현우는 등 뒤로 손을 뻗어 배낭 옆에 단단히 묶어둔, 날이 닳은 마체테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망할. 이 조용한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부서진 상점들의 잔해와 뒤엉킨 철근 더미 사이, 현우의 시선은 한 건물 옥상을 향했다. 옥상 한쪽이 기이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그 밑으로 검붉은 액체가 마치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액체 위로, 뭔가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척… 척…’
더욱 선명해진 소리에 현우는 잔뜩 웅크렸다. 몸을 숨긴 채 옥상을 올려다보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숨통을 조여오는 공포 그 자체였다.
옥상 중앙에는 족히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알 수 없는 형체가 마치 뿌리처럼 박혀 있었다. 검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점액질의 덩어리가 천천히 펄럭이고 있었다. 그 덩어리 위로 수많은 촉수들이 꿈틀거렸고, 그 촉수들은 끊임없이 옥상 바닥에 무언가를 긁고 있었다. 마찰음의 정체였다.
그리고 더욱 끔찍한 것은, 그 촉수들의 끝에는 각각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일그러진 비명과 고통이 담긴 얼굴들이 촉수의 움직임에 따라 왜곡되고 늘어나며 기괴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하… 젠장… 저게 뭐야…”
현우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저것은 대붕괴 이후 수없이 보아온 괴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대한 고깃덩어리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 알 수 없는 지성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했다. 촉수들이 긁어대는 옥상 바닥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둥근 원, 삼각형, 그리고 그 안에 새겨진 눈알 같은 형상들. 현우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주술이었다.
그때, 촉수 중 하나가 문양 한가운데를 긁어내자, 바닥에서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연기는 점차 짙어지더니, 공중에 한 형체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흐릿하고 불분명한 형체. 하지만 현우는 그것을 직감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었으나,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사지가 비정상적으로 길고 가늘었으며, 머리에는 뿔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다. 피부는 마치 말라붙은 진흙처럼 거칠었고, 두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우우우…’
낮고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소리는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수많은 벌레들이 한꺼번에 울부짖는 듯한,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소리였다.
“미친… 저것들이… 무언가를 소환하고 있어!”
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도망쳐야 했다. 당장이라도 등 돌려 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의 발은 마치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가 온몸을 짓눌렀다. 저 형체가 완전히 소환되면, 이 일대는 또 다시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어쩌면 이 도시 전체가 저 존재의 먹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마체테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절망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 동생에게 한 약속, 그리고 언젠가 이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거라는 희미한 희망.
“망할… 죽을 지언정, 저딴 것들에게 먹히지는 않아!”
현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옥상 위 괴물의 촉수들이 바닥의 문양을 마지막으로 긁어내고, 연기 속의 존재가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없었다.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마체테를 든 채로 폐허의 그림자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저 소환 의식을 막는 것. 그것이 미친 짓이라 할지라도,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폐허에서, 한 인간의 절규가 새로운 싸움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