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피안의 무정(彼岸의 無情)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눈을 떴다. 아니, 찢어진 것은 내 육신이었을까? 분명 방금 전까지 나는 낡은 침대 위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스마트폰 화면 속 무협 웹소설을 읽고 있었다. 지루한 일상, 반복되는 하루. 딱히 빛나지도, 그렇다고 암흑에 잠기지도 않은 회색빛 삶이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 이곳은…
축축하고 거친 흙바닥. 쾨쾨한 곰팡이 냄새와 알 수 없는 풀 비린내가 뒤섞인 공기.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난 손으로 무심코 이마를 짚었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 이 손은 내 손이 아니다. 그리고 내 눈에 비친 풍경 또한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낡은 목조 천장은 위태롭게 흔들렸고, 벽은 거미줄과 검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내가 누워있는 곳은 초라한 암자, 아니, 차라리 창고에 가까운 곳이었다. 혼란 속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스며들어오는 새로운 기억의 조각들.
‘진우.’
그것이 이 몸의 이름이었다.
‘청풍문’이라는 이름도 거창한 소문파의 막내 제자. 재능도 없고, 배경도 없는, 그저 허드렛일이나 하며 문파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자 같은 존재. 겨우 열일곱 살. 고작 그 나이에 내 전생의 30년 인생이 통째로 지워지고 새로운 삶이 덮어씌워진 것이다.
기가 막혔다. 허탈했다. 어차피 의미 없던 삶이었으니 미련은 없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했지만, 텅 빈 가슴 한쪽은 싸늘한 바람만 불어댔다. 아무런 예고도,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낯선 세상에 던져진 무력감. 이것이 이세계 전생이라는 건가? 웹소설에서나 보던 일이 내게 닥치다니, 심지어 주인공 보정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겨우 밥이나 축내지 않으면 다행인 신세라니.
그때, 저 멀리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천하제일 무도대회는 정말 역대급이라던데!”
“그럼! 마교 놈들의 음모가 밝혀진 이후, 무림의 존망이 걸린 일 아니냐! 이번 대회에서 무림 맹주가 결정될 테니, 어느 문파든 눈에 불을 켤 수밖에.”
“크흐, 명문 정파의 문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은거했던 고수들까지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하던데. 그야말로 천하의 모든 고수가 한자리에 모이는 거겠지!”
문득 창고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문에 다가갔다. 삐걱거리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 전생의 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거대한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산자락 아래,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기와지붕 위로는 용과 봉황의 조각이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고, 붉은 단청은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그 사이로 수많은 무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장삼을 걸친 승려, 화려한 도복을 입은 도사, 굳건한 갑옷 차림의 장수… 저마다 독특한 문파의 표식을 두른 채,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강호’인가. 내가 전생에 밤낮으로 읽던 무협 소설 속 세상.
나는 겨우 며칠 만에 이 몸의 기억을 통해 이 세계의 기본적인 정보를 습득했다. 대륙은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무림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이었다. 무림은 다시 정의를 표방하는 ‘정파’와 악을 일삼는 ‘사파’, 그리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마교’로 나뉘어 있었다.
최근 마교의 수장이 오랜 침묵을 깨고 암약하며 무림 전체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술법으로 백성들을 선동하고, 정파 문파들을 기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에 무림 맹주가 나서 각 문파를 규합하려 했으나, 마교의 교세는 워낙 강력했고, 무림 내부에서도 파벌 싸움이 끊이지 않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무림 전체의 단합과 새로운 맹주 선출을 위해 ‘천하제일 무도대회’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젠장, 저번에는 우리 문파에서도 몇 명 출전했었는데, 이번엔 예선 통과할 만한 놈도 없으니.”
“그래도 어르신이 대회 관리를 맡으셨으니,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냐?”
“뭐, 허드렛일이라도 해야지. 대회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
바로 옆을 지나치던 두 명의 청년 무사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나를 흘끗 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지나쳤다. 저런 무시가 익숙한 듯, 이 몸의 기억 속에서도 무수히 많은 멸시의 시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난 이 세계에서도 그저 먼지 같은 존재다.
나는 작은 문파의 잡역부 제자. 이곳 청풍문은 본래 약소 문파였으나, 이번 대회에서 문주가 대회 진행을 돕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어쩌다 보니 대회의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었다. 덕분에 이렇게 강호의 풍경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멀찍이 서서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정파 최고의 문파라 불리는 ‘화산파’의 제자들은 매화검법을 수련하며 꽃잎처럼 흩날리는 검풍을 일으켰고, ‘소림사’의 승려들은 금강역사와도 같은 기세로 대지를 울리는 권법을 연마했다. ‘무당파’의 도사들은 태극의 이치를 담은 검무를 추며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그들의 손끝에서 터져 나오는 기운은 내 영혼을 뒤흔들 만큼 경이로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동시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전생에서는 그저 수동적으로 스크린 너머의 활극을 즐기던 나였다. 주인공이 역경을 헤치고 성장하는 모습에 대리 만족하며, 언젠가 나도 저런 특별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을 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꿈의 무대에 직접 서 있었다.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지라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앙상하고 힘없는 주먹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만큼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마교의 음모? 무림의 존망?
솔직히 말해, 그런 거창한 일에는 아직 관심이 없었다. 다만, 더 이상 이렇게 무력하게 세상의 흐름을 지켜만 보고 싶지 않았다. 이 기구한 운명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 거대한 무대에 한 발짝이라도 내딛고 싶었다.
그때였다. 내 뒤편에서 낡은 방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야, 거기서 뭐 하느냐? 문주께서 네게 할 일이 있다고 부르신다.”
나직하지만 엄격한 목소리. 청풍문의 장로인 ‘곽 장로’였다.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지 말고, 어서 가 보거라. 이런 큰 잔치에 네 몸 하나 쓸모 있게 던지는 것만으로도 문파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곽 장로는 내가 무협 소설 속에서 흔히 보던, 은퇴한 꼰대 고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작은 문파의 살림을 책임지는,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예, 장로님.”
발길을 돌려 문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전히 수많은 무인들이 북적이는 마당을 가로질러 걷는 내 발걸음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무력감은 여전했지만, 그 바닥에서 아주 작고 희미한 불씨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무림.
그리고 나는, 진우다.
그저 구경만 하는 존재로 남지 않겠다.
언젠가는 나도 저들처럼, 아니, 저들보다 더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존재가 될 것이다.
아주 작은, 피안의 무정 속에 던져진 자의 첫 다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