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만 인파의 함성이 천룡대회전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돌계단은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고, 하늘 높이 솟은 거대한 기둥들에는 각 문파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강호의 위용을 과시했다. 이곳은 단순한 무술 대회가 아니었다. 천하의 명운이 걸린, 무림 최고수를 가리는 운명의 장이었다.
경기장 중앙의 거대한 단상 위. 두 명의 그림자가 칼날처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 명은 온몸에서 푸른 기운을 뿜어내는 ‘청룡검객’ 운현. 그의 검 끝에서는 마치 살아있는 용이라도 서린 듯 신비로운 기파가 일렁였다. 다른 한 명은 마치 그림자처럼 검은 도포를 두른 ‘만독서생’ 사패천. 그의 주변 공기는 기묘하게 왜곡되어 있었고, 섬뜩한 한기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흥, 감히 그대 따위가 현천보경의 수호자가 되겠다고? 가소롭군, 운현.” 사패천의 목소리는 비단결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독사의 비늘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단상 위를 맴돌았다.
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패천, 네놈의 무공은 이미 사도로 빠졌다. 역천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어찌 이런 네놈에게 현천보경을 맡길 수 있겠는가!” 그의 푸른 검이 번뜩이며 경고하듯 허공을 갈랐다.
관중석 깊숙한 곳, 평범한 한 소녀가 숨을 죽인 채 단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김하나. 겉보기엔 그저 호기심 많은 열일곱 소녀였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은하수 같은 별빛이 스며 있었다. 별의 수호자, 루나리스로서 그녀는 이 대회의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사패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검은 기운은 무림의 ‘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차갑고, 음습하며, 무언가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사악한 마력이었다.
“시작하라!” 심판의 외침과 함께 경기가 재개되었다.
사패천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그림자가 단상 위를 스치듯 사라지자, 수십 개의 잔상이 운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독사천환!” 검은 안개가 잔상들과 함께 운현을 포위했고, 그 안개 속에서는 뱀의 비늘 같은 검은 칼날들이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운현은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청룡검법, 제1식 비룡승천!”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기운이 거대한 용처럼 솟구쳐 올랐다. ‘크아아앙!’ 하는 환청이 들리는 듯, 용의 형상이 검은 안개를 찢고 솟아오르며 사패천의 공격을 모조리 흩어버렸다. 거대한 검기가 경기장 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기며 사패천의 잔상들을 지워버렸다.
하지만 사패천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는 운현의 등 뒤, 불과 한 뼘 거리에 나타나 있었다. 그의 손에는 섬뜩한 흑단비수가 쥐어져 있었고, 비수 끝에서는 검은 액체가 똑똑 떨어졌다. “늦었다, 운현.”
“젠장!” 운현은 뒤늦게 몸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고 직감했다. 그때였다.
“쳇, 너무 뻔한 수작이잖아!”
어디선가 날아든 맹렬한 기파가 사패천의 손목을 강타했다. ‘챙!’ 하는 쇳소리와 함께 흑단비수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사패천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고, 운현은 간발의 차이로 위기를 모면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방금 전까지 관중석에 앉아있던 김하나가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별빛처럼 반짝였고, 얼굴에는 단단한 결의가 비쳤다.
“네, 네가 왜 여기…” 운현이 놀라 외쳤다.
사패천은 흥미롭다는 듯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흥, 재미있는 꼬마로군. 그 정도 발경이라면 상당한 무공을 익혔다는 것인데… 넌 어느 문파의 제자냐?” 그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스쳤다. “하지만 감히 이 천룡대회전에 끼어들었다는 건… 죽음을 자처하는 짓이다.”
하나는 살짝 웃었다. “무공? 아니, 난 그런 거 안 배워. 그보다, 당신한테서는 정말 지독한 냄새가 나. 이건 무림의 기운도 아니고, 마교의 기운도 아니야. 저 차가운 힘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잖아?”
그녀의 말에 사패천의 미소가 굳어졌다. 경기장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림인들은 하나와 사패천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등장 자체가 충격이었다.
“건방진 계집!” 사패천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기운이 더욱 짙고 어둡게 변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며 경기장 바닥에 새겨진 신성한 문양을 뒤덮기 시작했다. “감히 나의 계획을 방해하려 하다니… 네놈을 이곳에서 갈기갈기 찢어주마!”
사패천의 몸이 순식간에 거대해지고, 그의 옷자락이 찢어지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끔찍한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형태를 벗어난, 비늘 돋친 피부와 뿔이 솟아오르는 기괴한 모습. 그것은 더 이상 무림 고수의 모습이 아니었다.
관중석에서는 비명과 함께 혼란이 터져 나왔다. 무림인들은 경악했고,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운현마저도 눈앞의 광경에 얼어붙었다. “이, 이건… 마물의 힘인가!”
하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역시… 이 자는 처음부터 이 세계를 노리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오색 수정구슬을 꺼냈다. 구슬은 그녀의 손안에서 부드럽게 빛났다.
“별빛이여, 나에게 힘을! 어둠을 걷어낼 찬란한 빛을!”
그녀의 주문이 터져 나오자, 오색 수정구슬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하나의 몸을 감싸고, 순식간에 그녀의 옷차림을 바꾸어 놓았다. 평범한 소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순백의 드레스와 은은하게 반짝이는 별빛 망토, 그리고 머리에는 초승달 모양의 티아라를 쓴 아름다운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거대한 별 모양의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고, 지팡이 끝에서는 영롱한 빛의 파편들이 흩날렸다.
별의 수호자, 루나리스의 강림이었다.
“천하의 운명이 걸린 이 대회에… 사악한 마물이 침범하려 들다니 용납할 수 없어!” 루나리스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치켜들고 단상 바닥을 강하게 내려쳤다.
‘콰앙!’
단상을 뒤덮었던 사패천의 검은 기운이 루나리스가 만들어낸 거대한 별빛 파동에 의해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경기장 바닥에 새겨진 신성한 문양들이 다시금 빛을 발했고, 사패천의 마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는 듯했다.
“크아악! 감히! 이 힘은… 도대체 네 정체는 무엇이냐!” 사패천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외쳤다. 그의 기괴한 얼굴이 증오로 일그러졌다.
루나리스는 지팡이를 휘둘러 빛의 방패를 만들어 운현을 보호했다. 그리고 정면으로 사패천을 마주 보았다.
“나는 별의 수호자, 루나리스! 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어둠에 맞서는 자! 네가 누구든, 네가 무슨 목적을 가졌든… 이 천룡대회전을 더럽히고, 이 세계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내가 막아설 것이다!”
그녀의 말과 함께, 루나리스의 온몸에서 휘황찬란한 별빛이 뿜어져 나왔다. 경기장의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무림 고수들의 무술 대회가,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마법과 마물의 대결장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