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균열**
유진은 자신이 현대 문명의 첨단에서 멀쩡히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17층 아파트. 번잡한 도시의 소음조차 얇은 유리창 몇 겹을 거치면 그저 멀고 아득한 배경음악이 되는 곳. 고도로 정비된 보안 시스템과 견고한 철문이 그녀의 사적인 공간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디자인 작업은 종종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익숙하고 편안한 루틴이었다. 노트북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어두운 거실을 희미하게 밝히는 가운데, 유진은 목덜미의 뻐근함을 풀기 위해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때였다.
탁.
작지만 선명한 소리가 적막을 뚫고 들렸다. 거실 테이블 위,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볼펜 한 자루가 제 발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 듯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유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실내엔 바람 한 점 없었다. ‘피곤해서 헛것이 들렸나?’ 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볼펜을 주워 올렸다. 그저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사소한 해프닝은 이내 반복되기 시작했다.
며칠 후,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주방 찬장에서 컵 하나가 떨어져 깨졌다. 이튿날 아침엔 침대 옆 협탁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가족 사진 액자가 뒤집혀 있었다. ‘내가 잠결에 건드렸나?’ 유진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애썼지만, 묘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분명히 어젯밤엔 똑바로 세워뒀는데.
그 후로 일상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분명 닫고 나왔다고 생각한 안방 창문이 살짝 열려 있거나,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기도 전에 ‘삑삑삑’하는 작동음이 들리는 일이 잦아졌다. 밤이 되면 아무도 없는 안방에서 흐느끼는 듯한 바람 소리가 들리곤 했다. 유진은 이웃집 소리일 거라고, 낡은 아파트의 배관 문제일 거라고, 애써 모든 것을 합리화했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 같은 건 없다고, 그녀는 믿고 또 믿었다.
하지만 합리화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유진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유독 길고 지쳤던 하루였다. 그녀는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고요했다. 도시의 불빛만이 창밖에서 아득하게 반짝였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바로 그때, ‘스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침대 옆 협탁 위, 자신이 아끼는 하늘색 도자기 컵이 서서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이라 거금을 주고 샀던 컵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을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컵은 가장자리로 이동하더니, 덜컥,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컵은 산산조각이 났다.
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누구… 누구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격렬하게 떨렸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으며 그녀의 신경을 조여들었다.
바로 그때, 방안의 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나갔다.
어둠. 완전한 어둠이 유진을 집어삼켰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너무 놀라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맡, 깨진 컵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바닥에서 ‘스륵, 스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미세한 소리였다. 하지만 유진은 똑똑히 들었다.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서로에게로 조금씩 모여들고 있었다. 딸깍, 딸깍,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면서. 그리고 그 조각들 사이에서, 아주 작고 섬뜩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가지 마…”
유진의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차갑게 흘러내렸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주 희미하고, 슬프고, 동시에 강렬한 집착이 담긴 속삭임.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구멍에 단단한 덩어리가 걸린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끔찍한 공포가 그녀의 혀와 목을 마비시켰다.
어둠 속에서, 깨진 컵 조각들이 완전히 하나로 합쳐진 듯한 형체가 만들어지더니, 이내 다시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정적.
다시 정적만이 남았다.
아니, 정적이 아니었다.
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
그리고, 저 멀리 거실에서 들려오는, 낡은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
타닥, 타닥.
마치 누군가… 천천히 발을 끌며 걷는 소리처럼.
그 소리는 점점 유진의 방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유진은 눈을 감았다.
이젠 피할 곳도, 기댈 곳도 없었다.
이 집은 더 이상 그녀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이젠 완전히 그녀의 방 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