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탐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심연 속, 금지된 맹세

**제 13화: 흔적**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강민은 손에 든 마석 등불을 높이 들었다. 빛이 닿는 곳마다 검은 이끼가 덮인 돌기둥들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어둠골짜기’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발밑에 깔린 자갈이 작게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마저도 거슬릴 만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괜찮아?”

강민의 낮은 목소리가 공기 중에 스며들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은 뒤따라오던 엘리시아의 얼굴을 정확히 찾아냈다. 은빛 피부는 등불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고, 새까만 눈동자는 주변의 모든 움직임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피로와 함께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얼굴빛이 창백했다. 게다가 이곳, 어둠골짜기는 그녀 같은 실프족에게 특히 더 가혹한 환경이었다. 생명력이 약해지는 것을 그녀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을 터였다.

강민은 손을 뻗어 엘리시아의 어깨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차가운 온기가 손끝에 닿았다. 그 순간,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깊게 흔들렸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가 금지된 세상에 속해 있었다. 인간과 실프족. 그들의 사랑은 심연의 저주처럼 깊고, 동시에 치명적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출구가 가까워.”

강민은 확신 없는 위로를 건넸다. 그도 알았다. 출구는커녕, 어둠골짜기 안으로 더 깊이 들어왔을 뿐이라는 것을. 며칠 전, 그들을 쫓는 ‘정화자’들의 추격을 피해 무작정 깊은 곳으로 도망쳐 온 것이 화근이었다. 정화자들은 실프족을 ‘불순한 존재’로 규정하고 절멸시키려는 광신도 집단이었다. 그리고 강민은, 그 ‘불순한 존재’와 함께 있는 죄인이었다.

갑자기 엘리시아가 멈춰 섰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공중을 가리켰다.

“강민… 느껴져.”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강민의 심장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했다. 그녀의 ‘느낌’은 보통의 감각과는 달랐다. 실프족 특유의 예민한 영적인 감각으로 주변의 기척이나 에너지를 읽어내는 능력. 엘리시아가 이렇게 분명히 말할 때는 보통 위험이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강민은 즉시 등불을 낮추고 주위를 경계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다가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뭘 느껴? 괴물? 아니면… 정화자들인가?”

엘리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건… 마나의 흐름이야. 우리와 비슷한데, 좀 더 거칠고… 낯설어.”

마나의 흐름? 강민의 미간이 좁혀졌다. 실프족은 정령과 유사한 순수한 마나를 다루는 종족이었다. 그들과 비슷한데 거친 마나라니. 낯선 종족인가? 아니면…

‘휘익-!’

날카로운 소리가 어둠을 찢고 날아들었다. 강민은 반사적으로 엘리시아를 끌어당겨 뒤편의 돌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팍!’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그들이 방금 서 있던 자리에 박혔다. 화살촉에는 푸른색 독액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크큭… 역시, 기척이 너무 선명했어.”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한 명이 아니었다. 둘, 셋, 넷… 덩치 큰 인영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투박한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날이 무딘 도끼와 활을 들고 있었다. 동굴의 어둠에 익숙한 듯 날카롭게 번득이는 눈동자는 영락없는 고블린 무리였다. 하지만 평범한 고블린과는 달랐다. 그들의 이마에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손에는 푸른색 마나 광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있는 고블린 주술사까지 있었다.

“실프족의 향기… 오랜만이군.” 고블린 주술사가 음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어둠골짜기에 감히 발을 들이다니. 마나를 먹어치우는 더러운 이방인이여.”

강민은 칼자루를 꽉 쥐었다. 이놈들은 단순히 침입자를 죽이려는 고블린이 아니었다. 실프족의 마나를 탐하는, 아니면 경멸하는 무언가였다. 엘리시아가 ‘비슷하지만 거친 마나’라고 말했던 것이 이 고블린 주술사의 마나를 두고 한 말이었을까.

“숨을 곳은 없어, 이방인. 너희의 기척은 달콤한 먹이처럼 우리를 부른다.”

고블린 주술사가 지팡이를 들자, 공기 중에 푸른색 마나가 꿈틀거렸다. 강민은 이를 악물었다. 정화자들의 추적을 피하려다 고블린 무리에게 갇힌 상황.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순 없었다. 무엇보다 엘리시아가 위험했다. 이 고블린들이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엘리시아, 내 뒤로!” 강민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엘리시아는 강민의 등을 잡고 바짝 붙었다. 그녀의 손에서 희미한 은빛 마나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능력은 전투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주로 정신계통이나 치유, 혹은 은신에 특화된 능력들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공격해라!” 고블린 주술사의 외침에 고블린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강민은 앞으로 뛰쳐나갔다. 첫 번째 도끼 공격을 칼로 막아내며 몸을 숙여 두 번째 고블린의 옆구리를 찔렀다. ‘커헉!’ 하는 비명과 함께 고블린이 쓰러졌다. 하지만 고블린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강민을 압박해왔다. 좁은 통로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강민의 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고블린들의 팔다리를 베고, 급소를 노려 심장을 꿰뚫었다. 그의 움직임은 정확하고 빨랐지만, 체력은 급격히 소모되고 있었다. 며칠간의 도주와 전투로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이었다.

그때, 고블린 주술사가 다시 지팡이를 들었다. 푸른색 마나가 응축되더니 강민의 발밑에서 뾰족한 얼음 가시가 솟아올랐다.

‘크윽!’

강민은 간신히 피했지만, 옷자락이 찢어지고 허벅지에 깊은 찰과상을 입었다. 피가 울컥 솟아났다. 쓰라린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강민!”

엘리시아의 절규가 귓가를 때렸다. 강민은 피 묻은 손으로 검을 꽉 쥐었다. 안 된다. 여기서 쓰러질 순 없었다. 그녀를 지켜야 했다. 금지된 사랑의 대가를 치를지언정, 그녀를 잃을 순 없었다.

고블린 주술사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힘이 빠지는군. 이방인. 이제 저 더러운 실프족을 내게 넘겨라. 그러면 편안하게 죽여주지.”

강민은 대답 대신 고블린들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상처 때문에 움직임이 느려졌다. 고블린들의 도끼가 연달아 그의 방패를 강타했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엘리시아가 강민의 옆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은빛 마나가 강렬하게 빛났다. 고블린들의 눈이 마나의 섬광에 멀어지듯 잠시 움츠러들었다.

“정신 교란!”

엘리시아의 나지막한 외침과 함께 고블린 주술사를 포함한 몇몇 고블린들이 갑자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서로를 공격하거나 허공에 칼질을 해댔다. 실프족 특유의 정신계 능력, ‘환혹(幻惑)’이었다. 강력한 공격력은 없지만, 이렇게 혼란을 주는 데에는 탁월했다.

강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혼란에 빠진 고블린들을 베어 넘기며 주술사를 향해 돌진했다. 주술사는 엘리시아의 능력에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 더러운 년! 감히…!”

주술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엘리시아를 향해 거대한 마나 구체를 날렸다. 강민은 몸을 던져 엘리시아를 감쌌다.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강민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다.

“커헉…!”

강민의 의식이 흐릿해졌다. 그는 쓰러지는 와중에도 엘리시아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의 품에 안긴 엘리시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 공포와 절망이 가득 차올랐다.

“강민! 안 돼…!”

엘리시아의 몸에서 은빛 마나가 폭주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강민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고블린 주술사의 마나 공격은 강민의 몸속 깊이 상흔을 남겼다.

의식이 멀어지는 강민의 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냄새… 실프족의 마나… 감히… 금지된 것을 섞다니…’

그것은 고블린 주술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깊고, 더 오래된… 이 어둠골짜기 자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음성이었다. 강민의 시야가 완전히 깜깜해지기 직전, 그는 보았다. 어둠골짜기의 깊숙한 곳에서, 붉은색 섬광이 깜빡이는 것을.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섬뜩한 빛이었다.

그리고 그 붉은 섬광 속에서, 고블린 주술사마저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제단… 저것은… 깨어나고 있다…!”

고블린 주술사의 떨리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들이 싸우는 소란이, 이 어둠골짜기의 무언가를 깨워버린 것일까.

강민의 손에서 마석 등불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마지막 희미한 빛마저 꺼지자, 어둠골짜기는 완전한 암흑에 잠겼다. 붉은 섬광만이 멀리서 그들을 비웃듯 깜빡였다.

엘리시아는 쓰러진 강민을 끌어안고 떨고 있었다. 고블린들의 외침도, 저 멀리서 빛나는 붉은 섬광도,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피 흘리며 쓰러진 강민, 그리고 그들의 금지된 사랑이 불러온 재앙뿐이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붉은 빛을 등지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고블린 주술사는 혼비백산하여 소리쳤다.

“도망쳐! 저것은… 심연의 파수꾼!”

너무 늦었다. 엘리시아는 품에 안긴 강민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은빛 마나가 폭주하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제 그들은, 이 심연에 갇힌 채 함께 죽음을 맞이할 운명인가. 아니면…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