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핏빛 그림자
달빛 골짜기는 언제나 고요했다. 천년 묵은 고목들이 엉겨 붙어 만들어낸 둥근 천장 아래, 영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마치 다른 세상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신비의 한가운데, 류진은 은설의 가느다란 손을 잡고 있었다. 차가운 이성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심장이 고동쳤다.
“오늘도 겨우 잠시뿐이군요.” 은설의 목소리는 영롱한 옥구슬이 부딪히는 소리 같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아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손가락이 류진의 뺨을 스쳤다. 얼음처럼 차가운 피부 아래로 은은한 온기가 전해졌다. “언제쯤 우리는 이렇게… 숨죽이지 않고 당신의 품에 안길 수 있을까요?”
류진은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그의 눈빛에는 단단한 결의와 함께 끝없는 회한이 서려 있었다. “곧.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이 금지된 운명을 제가 끝내리라 맹세합니다.”
그의 말에 은설은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의 맹세는 언제나 뜨겁지만, 세상은 차갑습니다, 류진. 당신이 속한 검선문(劍仙門)의 규율은 하늘보다 높고, 제가 속한 구미호족(九尾狐族)은 당신들의 눈에는 그저 사악한 요수(妖獸)에 불과하니….”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긴 속눈썹이 달빛 아래 그림자를 드리웠다. “우리의 사랑은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칼끝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비난하고 저주한다 해도, 내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류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강직함이 깃들어 있었다. “설령 세상 모든 이가 등을 돌린다 해도, 나는 당신의 편에 설 것입니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리라.”
그때였다.
정적을 깨고, 멀리서 아주 미세한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일반 수선자라면 감지하지 못했을, 극도로 예민한 감각만이 포착할 수 있는 작은 파문이었다. 류진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찌푸려졌다.
은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의 길고 뾰족한 귀가 옅게 떨렸다. “오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강한 영기입니다. 꽤나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어요.”
류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지?”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의 검집으로 향했다. ‘청광(靑光)’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그의 명검은 마치 주인의 긴장을 읽은 듯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냈다.
“이쪽입니다.” 은설은 손가락으로 달빛 골짜기 입구를 가리켰다. “낯설지 않은 영기예요. 검선문의 고위 진인(眞人)인 듯합니다. 설마… 뇌천진인(雷天眞人)입니까?”
류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뇌천진인. 검선문의 최고 원로 중 한 명이자, 가장 엄격하고 보수적인 인물. 인족(人族)의 순혈주의를 맹렬히 주장하며 요수(妖獸)들을 증오해 마지않는 자. 그가 여기까지 쫓아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떻게…?” 류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온갖 은폐 진법(陣法)과 환영술(幻影術)을 사용해왔다. 그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에게 오래된 영기 추적술이 걸려 있었나 봅니다.” 은설의 입술이 차게 굳어졌다. “아마 당신이 제 곁을 떠난 후, 저를 감시하던 자들이 마지막 기회를 엿보고 있었겠죠. 제가 당신을 만나러 나올 때를 노린 겁니다.”
그녀의 말에 류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했다. 은설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생각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한 것이다.
“숨어야 합니다.” 류진은 결심했다. “이 골짜기 안쪽에는 제가 발견한 미로 같은 지하 동굴이 있습니다. 그곳에 잠시 몸을 숨기고….”
“소용없을 거예요.” 은설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의 감지 능력이라면, 지하의 숨결까지 꿰뚫어 볼 겁니다. 더구나 뇌천진인이라면… 아마도 특수한 영물(靈物)이나 법기(法器)를 지니고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골짜기 입구에서 거대한 영기 폭풍이 몰아쳤다. 주변의 고목들이 뿌리째 흔들리고, 피어오르던 안개가 찢겨나갔다. 이내 그 폭풍의 한가운데서 한 줄기 빛이 내려앉더니, 건장한 체구에 희끗희끗한 수염을 기른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은 번개처럼 날카로웠고, 온몸에서는 압도적인 진인(眞人)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뇌천진인이었다.
그의 시선이 달빛 아래 나란히 서 있는 류진과 은설에게 꽂혔다. 그 차가운 시선은 마치 얼음 칼날 같았다.
“감히… 감히 이런 추잡한 짓을 벌였더냐, 류진!” 뇌천진인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골짜기를 울렸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역겨운 요괴 계집과 인간의 도리를 져버리는 사랑놀음이라니! 너는 검선문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렸고, 인간의 긍지를 더럽혔다!”
류진은 한 발 앞으로 나서 은설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진인께서는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제가 선택한 사랑에 역겨움이란 없습니다! 저희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뇌천진인이 비웃었다. “요괴와 인간의 교합 자체가 대죄이니라! 네놈은 검선문의 가장 뛰어난 인재 중 하나다. 그런 네놈이 요괴에게 홀려 인간의 씨를 말리려 하다니! 이 자리에서 저 요괴 계집의 목을 베어 네놈의 눈앞에 보인다면 제정신을 차리겠느냐!”
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검은빛을 띤 영력(靈力)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뇌천진인의 주특기인 ‘뇌정신격(雷霆神擊)’을 시전하려는 기세였다. 그 기술은 검선문의 제1술법으로, 산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위력을 지녔다.
“안 돼!” 류진은 눈 깜짝할 새에 ‘청광’을 뽑아 들었다. 푸른 검기가 달빛 골짜기를 가로지르며, 뇌천진인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류진은 이제 막 현경(玄境)에 접어든 젊은 수선자였지만, 그의 검술은 이미 대사(大師)의 경지에 가까웠다.
‘콰앙!’
검기와 뇌정의 충돌음이 귀청을 때렸다. 류진의 몸이 뒤로 밀려났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뇌천진인의 일격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건방진 놈! 감히 스승의 대리인인 내게 칼을 겨누다니!” 뇌천진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한 발 더 다가서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들더니, 번개가 그의 손끝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앞선 공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닌 일격이었다.
그때, 류진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은설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슬픔과 결연함이 교차했다. 그녀는 조용히 류진의 손을 잡았다.
“류진.” 은설의 목소리가 류진의 귓가를 스쳤다. “당신을 다치게 할 순 없어요.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안 돼, 은설!” 류진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소리쳤다. 요수족이 진정한 힘을 발현할 때는 종족의 본모습을 드러내야만 했다. 구미호족이 인간 모습으로 싸우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은설은 류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은빛 영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옷이 찢어지며, 희고 탐스러운 털이 돋아나고, 날카로운 발톱과 뾰족한 귀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로, 아홉 개의 은빛 꼬리가 우아하게 펼쳐졌다.
그녀의 본모습. 북령산맥을 호령하던 전설 속 구미호, 은설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뇌천진인은 경악했다. 그는 요괴를 증오했지만, 이렇게 완전한 형태의 구미호족을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압도적인 기운에 잠시 주춤했다.
은설의 아홉 꼬리가 일제히 뇌천진인을 향해 뻗어나갔다. 꼬리 하나하나에서 번개처럼 빠른 영기가 뿜어져 나왔고, 뇌천진인의 몸을 휘감았다.
‘크아아악!’
뇌천진인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의 강력한 뇌정신격이 은설의 꼬리에 의해 흐트러졌다. 은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류진의 손을 잡고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도망쳐요, 류진!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뇌천진인의 속박을 틈타 류진을 이끌고 달빛 골짜기 가장 깊은 곳, 천년 고목들이 더욱 빽빽하게 우거진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뇌천진인의 기운은 여전히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은설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막대한 영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어디 감히 도망치려느냐! 너희는 오늘 이 골짜기에서 내 칼에 피를 뿌리게 될 것이다!”
뇌천진인의 포효가 등 뒤에서 천둥처럼 터져 나왔다. 거대한 영압이 그들을 덮쳐왔다. 류진은 은설의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들으며, 이대로는 결코 도망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의 눈은 살기로 번뜩였다. 그는 ‘청광’을 다시 고쳐 쥐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은설을 살려야 했다. 그러나 은설은 고개를 돌려 류진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고 슬펐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평온함이 서려 있었다.
“함께해야 합니다, 류진.”
그녀의 목소리가 류진의 심장을 울렸다. 그녀는 류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정말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뇌천진인의 핏빛 그림자가 그들을 덮쳐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