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황량한 바람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폐허가 된 산등성이를 훑고 지나갔다. 강태한은 해진 야전점퍼의 깃을 더욱 바싹 여미며 고개를 들었다. 희뿌연 새벽빛이 지평선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고, 그 빛조차 이곳의 눅진한 어둠을 걷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발아래는 지면이 아니라 수천 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지층이었다.
“이게… 정말일까요?”
뒤따라오던 서아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미약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손에 들린 고도 측정기는 이들이 지금껏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곳, 말 그대로 지상에서 완전히 잊힌 곳에 서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태한은 낡은 양피지 지도를 펼쳐 들었다. 잉크가 바래고 종이가 삭아 너덜너덜해진 그 지도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와 기호들이 가득했지만, 한 지점만큼은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거대한 지하 구조물을 가리키는 듯한 기괴한 도형. 그리고 지금, 그 도형이 가리키던 바로 그 장소,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암반 사이에 거미줄처럼 파고든 균열 속에 그 입구가 드러나 있었다.
“보라고, 아영아. 이 질감, 이 문양… 이건 자연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게 아니야.”
태한의 손이 암벽에 새겨진 희미한 흔적을 더듬었다. 오랜 풍파에 닳고 닳았지만, 여전히 육안으로도 감지할 수 있는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기엔 너무나 이질적이었고, 자연의 조화라기엔 너무나 불길했다. 흡사 어떤 거대한 생물이 발톱으로 긁어낸 상처 같기도 했다.
아영은 헤드램프를 켰다. 강렬한 불빛이 좁은 틈새 너머의 어둠을 잠시나마 밝혔다. 틈새 안쪽은 곧장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아찔한 수직 통로로 이어졌다. 마치 세상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대한 구멍 같았다. 어둠 속에서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묘하게 비릿한, 쇠 비린내가 섞인 듯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낙반 위험이 있을 텐데요. 최소한의 지지대조차 없어요. 그리고… 이 냄새는 대체 뭐죠?”
아영의 걱정은 타당했다. 하지만 태한의 눈은 이미 그 너머의 미지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진 문명, 혹은 인류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어떤 존재의 흔적. 그 가능성은 태한을 미치도록 끌어당겼다.
“괜찮아. 우리는 이 순간을 위해 수년을 헤매었잖아. 어쩌면 이 안에서 인류의 기원에 대한 답을 찾을 수도 있어.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무언가를 마주할 수도 있고.”
태한은 조심스럽게 밧줄을 고정하고는 먼저 몸을 틈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이, 오직 어둠만이 그를 기다리는 곳. 헤드램프의 빛이 닿는 곳은 한정적이었지만, 그의 눈은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했다.
“태한 씨, 조심해요! 아래쪽에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아요!”
아영의 다급한 외침이 메아리쳤다. 태한은 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툭, 툭, 하는 불규칙한 물방울 소리 사이로, 바닥에서부터 희미하게 기어 올라오는 듯한 마찰음이 들렸다. 거대한 몸체가 축축한 바위를 스치며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공기 중에 감돌던 쇠 비린내가 더욱 짙어지는 것 같았다.
“뭔가 있다면… 우리와 같은 건 아닐 거야.”
태한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기대와 동시에 공포가 뒤섞인, 묘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다시 밧줄을 잡고 아래로 몸을 내렸다. 발이 닿는 곳은 울퉁불퉁하고 미끄러운 바닥이었다. 헤드램프를 최대한 아래로 비추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평범한 암반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눈이 동시에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벽화였다. 바위 표면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기괴한 문양들. 그것은 동물의 형상도, 인간의 형상도 아니었다. 촉수와 같은 팔다리가 얽히고설켜 있었고, 다면체적인 눈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응시하며 빛을 반사하는 듯했다. 심지어 벽화 속의 생명체들은 이 세계의 물리 법칙을 비웃는 듯한 각도로 뒤틀려 있었다.
“세상에… 이건… 대체…”
아영이 내려와 벽화를 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과학자였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최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떤 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절대적인 이질감 그 자체였다. 벽화 속 문양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바로 우리가 찾던 거야, 아영아. 인류의 어떤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잊힌 존재들의 흔적.”
태한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벽화에 손을 뻗었다. 차갑고 단단한 암벽에서 미약하지만 분명한 진동이 느껴졌다. 벽화의 문양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의 뇌리에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어둠, 심연 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 그리고… 귓가에 웅얼거리는 듯한 알 수 없는 언어.
그 순간, 거대한 지하 공간 전체를 흔드는 듯한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쿵, 쿵, 쿵. 마치 심장이 고동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아영은 비명을 지르며 태한의 팔을 붙잡았다.
“태한 씨! 지진인가요? 빨리 나가야 해요!”
하지만 태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벽화 너머,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거대한 통로의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진동의 근원지에서, 검고 끈적한 액체가 벽을 타고 서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액체 속에서, 벽화 속의 기괴한 형상들이 어둠과 하나가 되어 꿈틀거리는 듯한 환영이 아른거렸다.
“아니… 지진이 아니야.” 태한은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광기에 가까운 열망으로 번뜩였다. “이건… 부르는 소리야.”
그의 말을 끝으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 공간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렸다. 벽화의 한 귀퉁이에서, 방금 전까지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던 암석이 스르륵 밀려나며, 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욱 짙은 어둠이 그들을 집어삼킬 듯이 밀려왔다. 그 어둠 속에서, 인간의 언어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도 오래된,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영원히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고대의 비밀이,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