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도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황혼, 낡은 공장 지대의 가장 깊숙한 곳. 녹슨 철문 안쪽, 퀴퀴한 기름 냄새와 차가운 금속음이 뒤섞인 공간에서 한 사내가 망령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진우. 한때는 세계를 바꾸리라 믿었던 천재 공학자이자, 최강의 기체 ‘백야(白夜)’의 파일럿이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모든 것을 앗아간 그 녀석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지하 벙커에서 뼈를 깎는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젠장… 이래선 안 돼.”
진우의 손에 들린 스패너가 거친 소리를 내며 나사 위에서 미끄러졌다. 손목의 힘줄이 팽팽하게 솟아 있었지만, 며칠 밤낮을 새며 혹사당한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그의 얼굴은 피골이 상접했고, 짙게 드리운 그림자 아래 눈은 핏발이 서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빛만은 살아있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 불꽃은 오직 한 사람을 향한 증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증오의 근원은 3년 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그날이었다.
* * *
“진우야, 이 코어라면… 정말 해낼 수 있을 거야. 우리가 꿈꾸던 ‘백야’를 완성할 수 있다고!”
강민준. 언제나 웃음이 많았던 그 녀석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함께 밤을 새우며 ‘백야’의 설계도를 그리던 날들,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미래를 약속하던 순간들. 둘도 없는 친구이자, 꿈을 공유하는 형제나 다름없었다. 인류의 운명을 바꿀 궁극의 기체를 만들자는 그들의 맹세는,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의 결정체였다.
하지만 그 열정은 민준의 차가운 배신 아래 산산조각 났다. 그날, 완성 직전의 ‘백야’ 코어와 모든 설계 데이터, 그리고 진우의 명예와 미래까지도 송두리째 훔쳐 사라진 민준의 미소는, 이제 진우의 심장에 깊이 박힌 칼날이 되어 그를 끊임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
‘백야’는 민준의 손에 넘어갔다. 아니, 이제 더 이상 ‘백야’가 아니었다. 민준은 그 기체를 자신만의 이름으로 재탄생시켰고, 그것으로 세계의 질서를 뒤흔드는 거대한 권력을 손에 넣었다. 사람들은 민준을 영웅이라 불렀고, 진우는 이름 없는 폐인이 되어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 * *
“크윽…!”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작업대 위에는 산산조각 난 옛 코어의 잔해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보며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처참함을 동시에 느꼈다. 찢겨진 설계도 조각들을 그러모아 새로운 형태의 코어를 만들려 애썼다. ‘백야’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민준에게 다가갈 힘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나… 아직 안 죽었어. 절대 죽지 않아.”
그는 낡은 작업복 소매로 땀을 훔쳐내고 다시 스패너를 움켜쥐었다. 삐걱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공장 한쪽에서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진우가 ‘백야’를 만들기 전 시험 삼아 조립했던 구형 프레임이었다. 부서진 팔과 다리, 녹슬어 주저앉은 몸통은 마치 진우 자신의 현재를 보는 듯했다.
그는 이 낡은 고철 덩어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폐기 직전의 부품들을 그러모으고, 불법 시장에서 몰래 구입한 희귀 금속들을 밤낮없이 가공했다. 주먹만 한 파워셀 하나하나를 납땜하고, 닳아버린 서보 모터를 일일이 수리했다. ‘백야’의 정교함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이 기체에는 진우의 광기 어린 집념과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것이… 나의 또 다른 백야다. 네가 감히 손댈 수 없는… 오직 나만의.”
진우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새로 만든 코어를 기체의 심장부에 연결했다. 투박하지만 견고하게 짜여진 회로가 서로 맞물리는 순간, 지하 벙커 전체가 일순간 정전된 듯 암흑에 잠겼다. 이어진 것은 웅웅거리는 낮은 진동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진우의 눈빛이 섬광처럼 빛났다.
삐이이이– 띠리릭!
파워셀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코어 전체가 서서히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낡은 금속 프레임을 따라 에너지 흐름이 미세하게 번져 나갔다. 둔탁했던 기체의 관절들이 전압을 받자 찌르르 떨렸고, 멈춰있던 헤드 유닛의 센서 렌즈가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진우는 숨을 들이쉬었다. 3년 만에, 다시 기체가 그의 손끝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거였어.”
그는 허공에 띄운 홀로그램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속에는 지금 민준이 조종하고 있을, 완벽한 형태로 재탄생한 ‘백야’의 위용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 기체는 지금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는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역겨웠다.
“강민준… 네가 훔쳐간 건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어. 내 꿈이었고, 내 영혼이었다.”
진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야위고 지쳐 있었지만, 그 안에 깃든 증오는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타올랐다. 새로운 기체, 즉 아직 이름도 없는 그의 복수병기는 이제 막 눈을 떴을 뿐이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내가 널 얼마나 증오하는지… 그리고 그 증오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되는지.”
이곳은 그의 무덤이 될 수도, 그의 부활지가 될 수도 있었다. 진우는 두 손으로 차가운 기체의 철골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은, 이제 다시 시작될 잔혹한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것 같았다.
복수. 그 단어 하나가 그의 모든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