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우주, 그 심연의 어둠 속을 한 척의 함선이 조용히 미끄러져 나갔다. ‘그림자 까마귀’. 카엘은 조종석에 앉아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응시했다. 창백한 빛이 그의 얼굴을 스쳤지만, 감정 없는 눈동자 속에는 20년간 잊힌 적 없는 불길이 이글거렸다. 오른쪽 뺨의 길고 흉터는 그의 과거를 대변하는 듯, 핏빛으로 빛나는 나선 성운을 배경으로 더욱 선명해 보였다.
“목표, 포착.”
차가운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홀로그램 지도가 카엘의 앞에 펼쳐지고, 그 위로 거대한 함선 하나가 붉은 점으로 표시되었다. ‘오리온의 영광’. 우주력 253년, 은하연합의 영웅이라 칭송받는 지온 제독의 기함이었다.
카엘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영웅. 코웃음이 나왔다. 그 이름은 카엘의 심장을 찢어발겼던 배신자의 이름이었으니까.
* * *
“카엘, 봐! 우리가 해냈어!”
회색빛 연구실, 파직거리는 스파크 속에서 지온은 환호했다. 스물 초반의 젊은 얼굴에는 순수한 열정과 희망이 가득했다. 그들은 은하계의 지도를 다시 그릴 ‘워프 드라이브’의 핵심 시제품을 막 완성한 참이었다. 카엘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지온의 어깨를 툭 쳤다.
“아직 멀었어, 이 바보야. 이건 시작일 뿐이라고.”
그러나 카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지온과 카엘, 둘은 고아 출신으로, 오직 천재적인 두뇌와 우주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으로 뭉친 완벽한 파트너였다. 카엘이 이론의 빈틈없는 설계자였다면, 지온은 그것을 현실로 구현하는 데 탁월한 실행가였다. 그들의 꿈은 단 하나, 인류의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코스모스 상단’이라는 거대 기업이 그들에게 접촉했다. 상단은 그들의 기술을 눈여겨보고 막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지온은 흥분했고, 카엘은 본능적인 불길함을 느꼈다.
“지온, 조심해야 해. 그들의 눈빛이 너무 탐욕스러워.”
“무슨 소리야, 카엘! 우리의 꿈을 실현시켜 줄 거대한 기회라고! 이 자금과 인력이면 1년 안에 워프 드라이브를 완성할 수 있어!”
지온의 눈은 이미 성공의 황홀경에 취해 있었다. 카엘은 결국 지온을 설득하지 못했다. 아니, 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카엘의 불길한 예감은 정확했다.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코스모스 상단은 돌변했다. 그들은 기술을 통째로 강탈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내부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울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지온이 카엘을 지목했다.
“카엘, 미안해.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우린 너무 미약했어. 난 이 기술을 포기할 수 없어.”
지온의 목소리는 미약한 흔들림을 담고 있었지만, 눈빛은 이미 배신으로 굳어 있었다. 상단 병력들이 들이닥쳤고, 카엘은 반항했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 무력했다. 지온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애써 시선을 피했다. 카엘은 그날, 모든 것을 잃었다. 꿈, 친구, 그리고 자유. 그는 폐기된 인공 행성 교도소, ‘어둠의 심장’으로 끌려갔다.
* * *
“어둠의 심장”은 이름 그대로였다. 죄수들이 인류의 존재조차 모르는 심연의 광산에서 죽을 때까지 노동하는 곳. 빛 한 점 없는 곳에서, 카엘은 매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의 육체는 닳아 없어졌지만, 영혼은 더욱 단단하게 벼려졌다. 지온을 향한 복수심이 그의 유일한 생존 이유였다.
카엘은 밤마다 몰래 교도소의 시스템을 해킹했다. 버려진 부품들을 모아 통신 장비를 만들고, 틈틈이 탈출 계획을 세웠다. 5년. 지옥 같은 5년 후, 그는 기적처럼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15년. 카엘은 그림자 속에서 살았다. 용병, 현상금 사냥꾼, 불법 기술자. 온갖 어두운 직업들을 전전하며 돈과 정보를 모았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지온.
지온은 코스모스 상단의 품 안에서 날개를 달았다. 카엘이 설계했던 워프 드라이브는 그의 이름으로 완성되었고, 지온은 이를 이용해 수많은 미개척 성계를 발견,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은하연합군에 편입되어 승승장구했고, 이제는 기함 ‘오리온의 영광’을 지휘하는 제독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카엘의 꿈이었던 것들이, 지온의 영광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카엘은 그 빛을 집어삼킬 어둠이 되어 있었다.
버려진 폐기물 처리장에서 찾아낸 낡은 화물선을 그의 손으로 직접 개조했다. 녹슨 선체는 최첨단 스텔스 장비와 강력한 무기로 무장되었고, 엔진은 카엘이 직접 개발한 개량형 워프 코어로 교체되었다. ‘그림자 까마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궤적을 그리며, 복수의 날개짓을 시작했다.
* * *
“제독님, 전방 항로에 불안정한 에너지 파동이 감지됩니다.”
‘오리온의 영광’의 함교, 지온 제독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보고를 받았다. 그는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장하고, 은하연합의 푸른 제복이 잘 어울렸다.
“별일 아니겠지. 아마 소규모 운석 충돌이겠군. 경계만 강화하고 예정된 경로를 유지해라.”
지온은 자신감에 넘쳤다. 그는 지금 은하연합의 주요 보급선을 호위하며 신성한 의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함교의 모든 화면이 일제히 지직거렸다. 동시에 함선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경고! 워프 코어 이상! 외부 충격 감지! 실드 출력 30% 감소!”
“무슨 일이야?!” 지온은 당황하여 소리쳤다.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완벽한 은신. 카엘은 지온의 기함이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소행성 지대에 미리 초정밀 스텔스 지뢰를 설치해 두었다. 그 지뢰는 오직 특정 주파수에만 반응했고, 그 주파수는 ‘오리온의 영광’의 워프 코어에 치명적인 공명을 일으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본함과 호위함대의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보급선들의 워프 엔진이 먹통입니다! 고립되었습니다!”
카엘은 지온의 강한 자신감을 역이용했다. 지온은 그 어떤 위협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호위 함대와의 거리 유지를 소홀히 했고, 보급선과의 연결도 느슨했다. 이제 ‘오리온의 영광’은 홀로 고립된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젠장! 당했어! 저들의 정체를 파악해!” 지온이 이를 갈았다.
그때, 함교 메인 스크린에 그림자 같은 형체가 잡혔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기세는 마치 거대한 맹수 같았다. ‘그림자 까마귀’였다.
카엘의 목소리가 함교 내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낮고, 왜곡되었지만, 지온은 본능적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오랜만이군, 지온.”
지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카… 카엘?! 네가 어떻게… 살아있을 리 없어!”
“내가 죽었어야만 했지. 네 놈의 완벽한 계획을 망치지 않게.”
‘그림자 까마귀’는 거침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카엘은 ‘오리온의 영광’의 모든 설계도를 꿰뚫고 있었다. 그는 지온과 함께 그 함선의 초기 모델을 구상했고, 지온이 은하연합의 표준 규격에 맞추기 위해 바꾼 설계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방어막의 취약점, 무기 시스템의 맹점, 추진 기관의 불안정성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이건… 이건 우리가 만들었던 설계…!” 지온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리온의 영광’은 거대하고 강력했지만, 카엘의 정교하고 예측 불가능한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카엘은 광전사처럼 싸웠다. 그의 분노는 칼날이 되어 지온의 함선을 찢었다.
“네놈은 나의 꿈을 훔쳤고, 나의 삶을 파괴했어.” 카엘의 목소리는 분노로 타올랐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카엘은 ‘오리온의 영광’의 엔진을 직접 파괴했다. 함선은 표류하는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카엘은 함선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다. 그는 생존자를 찾으러 온다는 명목으로, 정교한 기동으로 ‘오리온의 영광’의 함교 도킹 포트에 자신의 함선을 연결했다.
“저 함선이… 접근합니다! 침입! 침입입니다!”
지온은 겁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그 거대한 함교에 단 한 명의 적이 침입했다는 사실이 그의 오만함을 산산조각 냈다.
도킹 포트가 열리고, 카엘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들려 있었다. 얼굴의 흉터는 빛나는 칼날처럼 섬뜩했다.
“지온.”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왜곡되지 않았다. 차갑고, 날카로운 본래의 목소리였다.
“카엘… 제발… 오해였어… 난 어쩔 수 없었어!” 지온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코스모스 상단은… 너무 강했어! 내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카엘은 비웃었다. “살아남기? 너는 나를 팔아서 네놈의 영광을 샀지. 네놈이 말하는 꿈은 나를 짓밟고 일어선 시체더미 위에서 피어난 가짜 꽃에 불과했어.”
“아니야! 우린… 우린 친구였잖아!” 지온은 거의 울부짖었다.
카엘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친구? 넌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를 더럽혔어. 넌 나를 심연에 던져놓고, 나의 모든 것을 훔쳐서 네 영광으로 삼았지. 네가 지금 누리는 이 모든 것이 바로 나의 피와 땀, 그리고 나의 배신당한 희망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잊었나?”
카엘은 플라즈마 블레이드를 들어 올렸다. 지온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제발… 살려줘! 내가… 내가 네게 모든 걸 돌려줄게! 이 함선도, 나의 모든 명예도!”
“돌려줘? 이미 네게는 아무것도 없어.”
카엘은 화면에 손을 뻗어 ‘오리온의 영광’의 메인 통신 채널을 강제로 개방했다. 동시에 함교 내부에 설치된 카메라가 작동했다. 이제 지온의 마지막 순간은 은하연합 전체에 생중계될 터였다.
“자, 네가 애써 쌓아 올린 영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걸 지켜봐라.”
카엘은 플라즈마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붉은 빛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지온의 비명은 채 끝나기도 전에 우주 공간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복수는 끝났다.
카엘은 지온의 시신을 뒤로하고 ‘그림자 까마귀’로 돌아왔다. 그의 함선은 ‘오리온의 영광’의 잔해 속에서 유유히 분리되었다. 폭발로 산산조각 나는 거대함선의 파편들이 칠흑 같은 우주 공간에 흩뿌려졌다. 그 광경은 마치 잔인한 불꽃놀이 같았다.
카엘은 조종석에 앉아 파괴된 함선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20년간 그의 심장을 갉아먹던 증오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 찾아온 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텅 빈 공허함이었다. 그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그 자신마저 알아볼 수 없는 깊은 상실감이었다.
오른쪽 뺨의 흉터가 다시 한번 창백한 별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이제 그 흉터는 복수의 표식이 아니라, 그가 지불했던 삶의 대가처럼 보였다.
카엘은 ‘그림자 까마귀’의 항로를 설정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미지의 우주 끝. 그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그는 자유로웠지만, 동시에 한없이 외로웠다.
‘그림자 까마귀’는 다시 한번 심연의 어둠 속으로 잠겼다. 덧없는 빛을 남기고, 아무도 모르게.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영원히 사라져 버린 그림자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