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리 위로 내리쬐는 태양은 여전히 붉었다. 핵의 불꽃이 대지를 태운 후, 몇십 년이 지나도록 하늘은 본래의 푸른빛을 되찾지 못했다. 대신 피처럼 붉은 기운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모든 생존자의 피부를 건조하게 만들었다. 먼지 섞인 열풍이 폐허가 된 경기장을 휩쓸었다. 한때 환호와 열기로 가득했던 관중석은 이제 금이 가고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로 뒤덮여 있었고, 듬성듬성 자란 잡초들만이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황량한 원형 경기장 한가운데, 간이로 만들어진 흙먼지 나는 무대 위에서 두 사내가 마주 서 있었다.
“드디어 세 번째 관문이군… ‘철벽’ 강진을 넘어서야 ‘대지’로 가는 길을 바라볼 수 있다니.”
관중석 잔해에 기대어 앉아 있던 한 노인이 거칠게 기침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친 피로와 함께, 한 줄기 희망을 갈구하는 듯한 빛이 어렸다. 모두의 시선은 무대 위 두 사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에 모인 수천 명의 생존자들, 황폐한 세상 속에서 삶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이들은 모두 ‘천하제일 무도대회’의 결과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우승자에게는 전설로만 전해지던 비옥한 땅, ‘대지’의 소유권이 주어질 터였다.
한쪽에는 거대한 덩치와 굳건한 자세로 뿌리 박고 서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강진. 별호는 ‘철벽’. 온몸의 근육은 강철처럼 단단하게 뭉쳐 있었고, 그의 눈은 투박하지만 굳건한 의지로 번뜩였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 투박한 대도(大刀)였으나, 그 위압감은 여느 명검 못지않았다. 강진은 느릿하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대지로부터 올라오는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의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어설픈 기술로는 이 강진의 벽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강진의 목소리는 굵고 낮았다. 거친 숨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그의 선포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없이 왜소해 보이는 청년, 류건이 서 있었다. 류건은 허리춤에 찬 낡은 검을 굳게 잡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새벽 이슬처럼 맑았다. 강진의 압도적인 기세 앞에서도 류건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차분한 집중력이 가득했다. 그의 몸은 거친 바위보다 유연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았다.
“강진 대협의 철벽을 깨려면… 어설픈 기술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저는 제 검을 믿습니다.”
류건은 나직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함께, 결코 꺾이지 않을 강철 같은 심지가 담겨 있었다.
‘정면 돌파는 무리다. 저 거대한 육체와 굳건한 내공은 웬만한 공격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터. ‘철벽’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겠지. 내가 가진 유일한 강점은… 속도와 유연함.’
류건의 뇌리에는 순식간에 수십 가지의 상황 분석과 대응책이 스쳐 지나갔다. 지난 두 차례의 혈전에서 그는 온몸의 기력을 소진할 뻔했다. 이 강진과의 대결이 마지막 고비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먼저 움직인 것은 강진이었다. 거대한 몸집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류건을 향해 돌진했다. 대도가 허공을 가르며 우렁찬 바람 소리를 냈다.
“받아라! 철혈 맹참(鐵血猛斬)!”
강진의 첫 공격은 이름 그대로 피 냄새 나는 맹렬한 일격이었다. 대도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궤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류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경기장의 바닥이 진동할 정도의 기운이 검날 끝에 응축되어 있었다.
‘피한다!’
류건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강물 위를 미끄러지는 한 잎의 갈대 같았다. 검은 류건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고, 류건이 서 있던 자리는 대도가 파고든 충격으로 깊은 균열이 생겨났다. 흙먼지가 폭풍처럼 치솟았다.
“빠르군! 하지만 피하는 것만으로는 날 이길 수 없다!”
강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대한 몸으로 연속 공격을 퍼붓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그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맹렬한 기세로 다시 한번 류건을 향해 휘둘러졌다.
류건은 몸을 낮게 숙여 강진의 다리 쪽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섬광처럼 뽑혀 나갔다. 낡은 검날이 강진의 허벅지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무모하군!”
강진은 비웃음 섞인 소리를 내뱉으며 대도를 거둬들여 검날의 옆면으로 류건의 검을 후려쳤다. 묵직한 충격과 함께 류건의 검이 튕겨 나갔다. 그의 손목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류건은 이미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검이 튕겨 나가는 반동을 이용해, 류건은 강진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이게… 무슨!”
강진은 눈을 크게 떴다. 류건의 팔꿈치가 마치 번개처럼 솟구쳐 올랐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류건의 팔꿈치가 강진의 명치에 정확히 박혔다. 강진의 몸이 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균형을 잃는 모습은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강진의 입에서 억하는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고통과 당황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크으으윽… 이런… 야비한!”
강진은 한 손으로 명치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운 듯 신음했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철벽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역시… 명치에 내공을 모아 단련했군.’
류건은 자신의 일격이 생각보다 큰 타격을 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강진의 내공은 그의 육체만큼이나 견고했던 것이다. 류건은 뒤로 물러나 강진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는 숨을 고르며 강진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강진은 눈을 부릅뜨고 류건을 노려보았다.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그의 눈빛은 이글거리는 용광로 같았다.
“내가… 너 같은 애송이에게 이런 식으로 당하다니! 용서 못 한다! 필멸 벽력(必滅霹靂)!”
강진의 대도에서 푸른빛이 섬광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순수한 내공의 기운이 검날을 휘감은 것이었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커지며 거대한 파동을 이루었고, 경기장 전체가 그 기운에 짓눌리는 듯했다. 필멸 벽력, 강진의 필살기였다. 일격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듯, 그의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것은… 피할 수 없다!’
류건은 직감했다. 이 거대한 기운의 폭발을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면으로 받아내거나, 아니면…
류건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기운이 미친 듯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류건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의 온몸에서 미세하지만 맹렬한 내공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단 한 번의 기회!”
류건은 낮게 읊조리며 허리춤에 찬 낡은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검날에 류건의 내공이 모여들자, 낡은 검은 마치 새로 벼린 것처럼 선명한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강진의 거대한 푸른 섬광이 류건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해 들어왔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 순간, 류건은 마치 모든 중력을 거부하듯 땅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그의 움직임은 눈으로 쫓기 힘들 만큼 빨랐다. 강진의 필살기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파괴하며 흙먼지를 뒤집어썼지만, 류건은 이미 공중으로 몸을 던진 후였다.
“무슨… 짓을!”
강진은 경악했다. 자신의 필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고, 오히려 그 힘을 타고 넘어오는 류건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다.
공중에 뜬 류건의 검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의 검은 강진의 머리 위에서부터 아래로, 모든 기운을 응축하여 꽂아 내렸다.
“유수검결(流水劍訣), 단공참(斷空斬)!”
강물처럼 유연하게 흐르다가, 결정적인 순간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일격!
류건의 검은 강진의 거대한 대도와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았다. 대신, 번개처럼 빠르게 강진의 목덜미를 노렸다. 필살기를 방출한 후, 잠시나마 허점이 생겨난 그 찰나의 순간을 류건은 놓치지 않았다.
“흐읍!”
강진은 뒤늦게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철벽 같은 육체도 그 일격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피가 뿜어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검날이 그의 피부를 깊숙이 베고 지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굳건했던 시선이 흐려지며, 강진의 거대한 몸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류건은 착지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의 검 끝에서는 피가 맺혀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경기는 침묵에 잠겼다. 수많은 생존자들이 숨을 죽이고, 무대 위 두 사내를 주시했다.
강진은 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으나, 그 안에는 깊은 충격과 함께 알 수 없는 좌절감이 비쳤다. 그는 천천히, 마치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듯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거대한 대도가 흙먼지 위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젠장… 내가… 지다니.”
강진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가득했다. 그의 패배는 단순히 한 경기에서의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대회를 통해 ‘대지’를 얻어내어 동료들을 살리려 했던 그의 모든 염원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류건은 강진을 바라보았다. 승리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기쁨 대신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이 대회는 모두의 간절한 염원이 충돌하는 격전장이었다. 승자는 단 한 명 뿐이지만, 패자 역시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강진 대협… 부디 몸조리하십시오.”
류건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승리자는 패자에게 연민을 보일 여유조차 없었다. 다음 상대는 더욱 강할 것이고, 그는 아직 ‘대지’에 닿지 못했다. 붉은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길게 드리워진 류건의 그림자가 흙먼지 쌓인 경기장 위로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직… 멀었다.’
류건은 낡은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심장은 다음 관문을 향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