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는 하늘을 먹고, 침묵은 땅을 집어삼켰다. 한때 문명의 꽃을 피웠던 도시의 잔해는 거대한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강민준은 낡은 방독면 안으로 쿰쿰한 먼지 냄새를 들이마시며 무너진 백화점의 외벽을 타고 조심스럽게 올랐다. 그의 발밑에서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굴렀다.
“젠장, 또 꽝이잖아.”
민준은 투덜거렸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백화점 옥상에 숨겨져 있던 비상용 식량 창고는 이미 오래전에 약탈당한 듯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이라곤 녹슬어 반쯤 부러진 선반과 곰팡이가 피어 새까매진 종이 조각들뿐. 그는 허탈하게 주저앉아 낡은 배낭을 내려놓았다. 목에 건 방사능 측정기는 여전히 안전한 수치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염되지 않은 공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자원이었다.
해가 기울자, 붉은 노을이 회색빛 도시 잔해 위로 길고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짐승의 울음소리가 민준의 신경을 긁었다. 이 폐허에서 홀로 살아남기란 매 순간이 싸움이었다. 식량, 깨끗한 물,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한 잠자리를 찾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이대로는 안 돼.”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지도를 꺼냈다. 폐허가 되기 전의 도시 지도 위에 직접 손으로 위험 구역과 던전 출현 지점을 표시해둔 것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점을 짚었다. 『옛 지하철역 – 던전 C급』. 그곳은 다른 스캐빈저들이 이미 수없이 들락거렸을 위험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물 정화 키트’ 조각이 발견될 확률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남은 식수 정화제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하… 갈수록 미쳐가는군.”
민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독면의 공기 필터를 교체하고, 어깨에 맨 낡은 소총을 고쳐 잡았다. 탄약은 서른 발이 채 되지 않았다. 던전 안에서 쓸데없이 낭비할 수는 없었다. 칼날이 무뎌진 식칼과 녹슨 쇠파이프가 그의 또 다른 무기였다. 이 썩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기댈 곳은 오직 제 몸뚱이뿐이었다.
***
옛 지하철역 입구는 거대한 흉터처럼 벌어져 있었다. 철제 셔터는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고, 검게 그을린 벽면에는 정체 모를 덩굴 식물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눅눅한 흙먼지와 비릿한 곰팡이 냄새를 풍겼다. 민준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 들린 손전등 불빛이 지하로 향하는 길을 위태롭게 비췄다.
“지하철은 이미 끊겼는데, 여긴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는군.”
그의 말대로, 역 안은 희미한 불빛들로 어렴풋이 밝혀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아니었다. 찢어진 깃발처럼 늘어진 거미줄, 그 사이를 오가는 기괴한 형상의 그림자들. 핏자국으로 얼룩진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스캐빈저들의 유서, 혹은 경고문들. 『경고: B구역, 미확인 변이체 출현』, 『제발… 돌아가라…』
민준은 헛기침을 하며 침을 삼켰다.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지하 2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옆의 비상 통로 계단을 이용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내려가던 그때, 삐걱이는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뭐지?”
그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손전등 불빛을 끈 채 귀를 기울였다. 철제 기둥 뒤편에서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민첩하고 재빠른 움직임. 그리고 섬뜩한 눈빛.
**[변이 쥐 – 일반 등급]**
낡은 시스템 창이 민준의 시야에 떠올랐다. 이 세계가 완전히 뒤틀린 후,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등급과 정보가 마치 게임처럼 머릿속에 투영되는 것. 덕분에 스캐빈저들은 최소한의 정보라도 가지고 위험에 대처할 수 있었다.
변이 쥐. 일반 등급이라고는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적이었다. 이빨에는 부식성 독이 묻어있고, 날카로운 발톱은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었다. 민준은 숨을 죽인 채 쥐의 움직임을 살폈다. 놈은 무엇인가를 킁킁거리며 냄새 맡고 있었다.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한 발, 한 발. 바닥에 떨어진 자갈이라도 밟을까 숨죽이며 나아가던 그때였다.
“찍!”
민준의 발치에서 또 다른 변이 쥐가 튀어나왔다. 놈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민준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오랜 생존 경험은 그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그는 놈이 달려드는 순간, 손에 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크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쥐는 벽에 부딪혔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놈은 아직 살아있었다. 분노한 듯 더욱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민준의 다리를 물려고 달려들었다.
“젠장, 끈질긴 놈!”
그는 놈의 머리를 향해 쇠파이프를 내리찍었다. 이번에는 정확히 명중했다. 쥐는 축 늘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그제야 민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안심할 틈도 없었다. 첫 번째 쥐의 비명소리에 이끌려 사방에서 녀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희미한 손전등 불빛 아래, 붉게 빛나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민준을 향했다.
“젠장, 쥐떼라니!”
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쇠파이프를 고쳐 잡았지만, 이 많은 놈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지하 2층으로 가는 통로에서 이미 다른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싸우다 죽을 것인가. 민준의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생각이 스쳤다. 그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부서진 가판대, 폐기된 자판기, 그리고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겨있는 지하철 승강장.
“좋아, 여기까지 왔으니 돌아갈 순 없지!”
그는 결심했다. 쥐떼를 향해 소총을 겨누었다. 아껴야 할 탄약이었지만, 이대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터였다.
“죽어라, 이 쓰레기들아!”
굉음과 함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지하철역의 어둠 속에서, 강민준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그의 생존을 위한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