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 달 아래 맺은 서약
바람은 깊은 산속을 맴돌다 깎아지른 절벽 끝, 푸른 이끼 낀 바위틈에 스며들었다. 그곳에 자리한 작고 비밀스러운 동굴은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단절된 듯 고요했다. 동굴의 안쪽, 물방울이 맺힌 벽면을 따라 흐르는 푸른빛은 마치 심해 속 보석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 빛 아래, 두 그림자가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다.
강휘는 연희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머리칼에서는 달큰하면서도 서늘한, 숲의 새벽 이슬 같은 향기가 났다. 연희의 가는 손가락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듯 따스한 온기가 파도처럼 스며들었다.
“강휘… 벌써 달이 중천이군요.”
연희의 목소리는 맑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신비로웠다. 인간의 언어를 완벽히 구사했지만, 그 음색에는 태곳적부터 존재했던 종족 특유의 이질적인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푸른빛을 머금은 눈동자에는 걱정과 애정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강휘는 연희를 더욱 품에 깊이 안았다.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군. 그대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그렇다오.”
그는 연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강휘의 심장이 다시금 격렬하게 울렸다. 인간과 마족.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저주받은 혈통,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맹목적으로 갈구하게 된 사랑. 그들의 관계는 세상의 모든 도리와 상식을 거부하는 금기 그 자체였다.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건 아닌지….” 연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눈은 강휘의 등 뒤, 어둠이 깔린 동굴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저 밖에는 그들의 사랑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인간의 세상이 있었다. 그리고 연희에게는, 이 인간의 세상만큼이나 잔혹한 마계가 있었다.
강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천하를 유람하며 수많은 강호의 풍파를 겪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떤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평화를 느끼오. 그대가 내 옆에 있기에.” 그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무림의 젊은 고수로 이름을 떨치며 온갖 찬사와 도전을 받아왔지만, 강휘의 마음은 언제나 메마른 사막과 같았다. 연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연희는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에는 희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강휘, 당신이 저로 인해 위험에 처하는 것이 저를 가장 아프게 합니다. 마족과 인간의 피가 섞인다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용납되지 않는 일. 굳게 닫힌 문을 억지로 열려는 어리석음일 뿐.”
“어리석음이라도 좋소.” 강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동굴의 푸른 빛보다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내 비록 무림에 몸담고 수많은 정의를 논했지만, 그 모든 정의가 우리의 사랑을 부정한다면… 난 기꺼이 그 정의와 맞서 싸울 것이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지켜줄 것이오.”
연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어리석은 당신… 하지만 그래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단 한 번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발버둥 치던 저를, 이렇게 나약하게 만드는 당신을….” 그녀는 강휘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두렵습니다, 강휘. 이 행복이 너무나 아득해서, 언젠가 산산조각 날까 봐.”
강휘는 연희의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두려워 말아요. 이 산이 무너지고 저 강이 마른다 해도, 내 마음만은 변치 않을 것이오. 그대와 내가 함께라면,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소.”
그의 목소리는 낮고 확신에 차 있었다. 연희는 그제야 안심한 듯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동굴은 다시금 정적에 잠겼고, 오직 푸른빛만이 그들을 고요히 비추고 있었다.
그때였다.
동굴 바깥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동물의 움직임이라 하기엔 너무나 규칙적이고, 경계심 가득한 걸음이었다. 강휘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로 향했다.
연희의 몸이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강휘… 인간의 기척입니다.” 그녀는 인간의 기운을, 그것도 강휘와 같은 무림인의 기운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꽤 가까이 접근했군.” 강휘는 속삭였다. “여기까지 발길이 닿을 리가 없는데… 설마?”
그의 얼굴에 비장한 결의가 스쳤다. 그는 재빨리 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희, 잠시만 숨어 있도록 해요. 내가 처리하고 오겠소.”
하지만 연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이젠 두려움 대신 결연함이 어려 있었다. “아닙니다, 강휘. 이번엔 제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당신 혼자 이 모든 짐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어요.”
그녀의 어깨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듯했다. 그것은 연희가 본모습으로 변하기 전 나타나는 마기(魔氣)의 기운이었다.
강휘는 연희의 손을 꽉 잡았다. “아니오! 절대 안 됩니다. 그대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오. 이건 내게 맡기고… 어서!”
그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동굴 입구에서 한 줄기 희미한 불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동시에, 날카로운 경계의 목소리가 동굴을 꿰뚫었다.
“거기 누구냐! 이곳은 금지된 구역이다.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강휘는 재빨리 연희를 동굴 안쪽의 깊숙한 틈으로 밀어 넣었다. “숨어요! 내 말이 끝나기 전까진 절대로 나오지 마시오!”
그리고 그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차가운 검날에 동굴의 푸른빛이 반사되며 섬뜩한 광채를 뿜어냈다. 강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발소리는 이미 동굴 입구 바로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결국… 올 것이 왔는가.’
강휘는 검을 굳게 쥐었다. 그의 등 뒤, 어둠 속에 숨어있는 연희를 지켜야만 했다. 설령 이 모든 강호와 맞서게 된다 할지라도.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동굴 밖에서는 이미 두 명의 무사가 동굴 안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계와 의심이 가득했다.
“무례한 자들…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강휘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칼날 같은 그의 말에, 무사들은 잠시 주춤하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깊은 산속, 은밀한 동굴에서 튀어나온 인간의 기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둠 속, 연희는 강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그의 단단한 어깨가 위태롭게 느껴졌다. ‘강휘…!’
연희의 손끝에서 섬뜩한 푸른 마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강휘의 말을 어기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홀로 위험에 처하는 것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었다. 금지된 사랑의 대가는 언제나 이렇게 잔혹한 것일까.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절규하듯 흔들렸다. 동굴 안은 이제 강휘의 검기와 연희의 은밀한 마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바깥의 무사들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들이 마주하려는 것이 단순한 무림 고수가 아님을. 그리고 그 고수 뒤에 숨겨진,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금기의 비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