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도시의 거대한 기계 심장이 내뿜는 웅장한 증기음과 저 멀리 하늘을 가르는 비행선들의 규칙적인 엔진 소리가 이 아파트 12층까지 희미하게 스며들 뿐이었다. 지훈은 늘 그랬듯 식탁에 앉아 식어버린 차를 홀짝였다. 그의 앞에는 에테르 디스플레이가 장착된 서류 패드가 놓여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였다. 찌걱, 하는 낡은 기계음이 고요를 갈랐다. 지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거실 한편에 놓인 증기압식 자동화 시계로 향했다. 시계는 지금 정시를 알릴 때가 아니었다. 톱니바퀴가 억지로 맞물리는 듯한 불협화음이 짧게 이어지더니, 이내 금속 인형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침은 멈춰 있었다.
“……고장 났나.”
지훈은 작게 중얼거렸다.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워낙 오래된 기계들이 많다 보니 가끔 멋대로 오작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찻잔을 들고 일어섰다. 몸을 움직이자 찌뿌드드했던 어깨가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차갑게 식은 차를 버리고 새로운 차를 끓일 심산이었다.
주방으로 향했다. 벽에 매달린 놋쇠 주전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주전자 옆 압력 게이지는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지훈이 주전자 손잡이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악!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놋쇠 주전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압력 게이지의 바늘은 마치 미친 듯이 붉은색 한계점을 향해 치솟았다. 찌이이이이익, 하는 섬뜩한 증기음이 주전자 밑바닥에서 뿜어져 나왔다. 주방이 순식간에 뜨거운 증기로 가득 차 올랐다. 지훈은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이게… 뭐야!”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전자를 노려봤다. 압력 밸브는 건드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주전자에서 뿜어져 나오던 증기가 잦아들자, 주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압력 게이지의 바늘은 다시 평온하게 푸른색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훈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엄청난 양의 증기가 뿜어져 나왔는데, 주방의 공기는 오히려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왠지 모를 으스스한 한기가 그의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차를 끓이는 것을 포기하고 서둘러 주방을 벗어났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에테르 디스플레이 앞에 앉았다. 서류 패드의 화면은 푸른빛을 잔잔히 내뿜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을 넘겼다. 그때, 톡, 하고 건반 하나가 제멋대로 눌리는 소리가 났다. 지훈은 움찔했다. 분명 그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투박한 놋쇠 건반으로 향했다. ‘A’ 키가 살짝 눌려 있었다.
이내, 옆에 놓인 종이 묶음이 스스슥, 하고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지훈은 숨을 멈췄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누가.
누가 지금 내 아파트에 있는 거지?
그는 벌떡 일어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이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건 차가운 정적뿐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방금 일어난 일들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그때, 거실 중앙에 놓인 육중한 기계식 스탠드 조명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자리에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칙, 칙, 하는 유압식 움직임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조명의 놋쇠 팔이 삐걱이며 돌아가더니, 거실 한편에 놓인 낡은 태엽식 전축을 향해 정확히 조명빛을 비췄다.
전축은 잠자코 있었다. 오래된 음반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달칵.
전축의 재생 바늘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바늘이 음반 위로 내려앉았다. 지지직, 하는 노이즈와 함께, 이내 알아들을 수 없는 낡은 노랫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낯선 가사를 중얼거렸다.
“……”
지훈은 굳어선 채 전축을 노려봤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이것은 단순한 오작동이 아니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공간에 있었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침실로, 잠겨 있는 침실로 피해야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의 발소리가 비명처럼 크게 들렸다. 찢어지는 듯한 노랫소리는 그의 모든 신경을 갉아먹는 듯했다. 그는 간신히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쾅, 하고 문을 닫고, 이내 잠금쇠를 걸었다. 철컥. 안전할 거라는 헛된 기대를 품은 채.
밖에서 들리던 전축 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침실은 암전 속에 갇혔다.
지훈은 숨을 헐떡이며 벽에 기대섰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했다.
안전해.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해.
그때였다.
쿵!
침실 문이 거칠게 울렸다. 마치 육중한 쇠망치로 내리친 듯한 굉음이었다. 지훈은 비명을 삼켰다.
쿵! 쿵! 쿵!
규칙적이고 폭력적인 충격이 문을 두드렸다. 나무 문이 삐걱이며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워졌다.
이내 모든 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
지훈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문을 노려봤다.
방금 전까지 들리던 증기음도, 도시의 소리도,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침묵.
소름 끼치는 절대적인 침묵이 아파트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찌이이이이익……
지훈의 침대 옆에 놓인 작은 놋쇠 오르골에서,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태엽은 감겨 있지 않았다.
오르골 뚜껑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안에서부터, 끔찍하게 뒤틀린 자장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음반이 긁히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의 등 뒤에서, 섬뜩한 한기가 폐부를 찔러왔다.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창밖의 도시 풍경은 마치 누군가 그림판을 긁어놓은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일그러진 풍경 너머로,
새까만 그림자가,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창문 유리에, 붉은색 글씨가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
**_돌려줘.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