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도시의 공기마저도 고층 아파트의 굳건한 창문 너머에서 흐릿하게 느껴지던 밤이었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미로 같은 도시 속, 서른 평 남짓한 강철과 석고보드의 섬에 홀로 떠 있는 민아는 익숙한 고독 속에서 지루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마시다 만 차가운 물컵과 읽다 만 우주 생물학 개론서가 놓여 있었다. 별다른 일이 없는 평범한 일상, 그녀가 꿈꾸던 ‘안정’이었다.
똑.
싱크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개를 돌려 주방을 힐끗 보았지만, 수도꼭지는 단단히 잠겨 있었다. 착각이었겠지. 민아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똑.
이번엔 좀 더 가까이에서 들렸다. 식탁 유리 위에서 뭔가가 톡, 하고 튀어 오르는 듯한 소리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민아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식탁 위, 방금까지 책을 읽던 손으로 만졌던 펜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아주 작은 진동이 펜을 관통하는 것처럼.
“뭐야?”
민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다. 환풍기 소리인가? 아파트 전체에 흐르는 미세한 지반 진동 같은 건가?
펜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너무나 평범한 은색 볼펜이었다.
그날 밤 이후, 이상한 일들은 점점 빈번해졌다.
열쇠가 사라졌다. 분명히 현관 옆 열쇠걸이에 걸어두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는 서랍장 안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새벽에 깨어나면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스위치를 끈 기억이 확실한데도.
가장 섬뜩했던 것은, 한밤중에 부엌에서 접시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귀를 기울이면 꼭 누군가 식기를 정리하는 소리 같았다. 민아는 공포에 질려 숨을 죽였다. 땀이 식은땀으로 변해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도록 벌벌 떨었다.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겨우 용기를 내어 주방으로 향했지만, 모든 것은 완벽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설마… 귀신인가?”
민아는 혼잣말을 했다. 과학을 맹신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유령 같은 존재는 미신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은 그녀의 이성을 흔들었다.
“있잖아, 요즘 우리 집이 좀 이상해.”
며칠 뒤, 참다못한 민아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 희원에게 털어놓았다.
“갑자기 불이 켜지고, 물건이 사라졌다가 엉뚱한 데서 나타나고… 접시 소리까지 나.”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혹시 요즘 스트레스 너무 받는 거 아니야? 아니면… 누가 네 집 들어온 거 아니야? 스토커라든지.”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문은 전부 잠겨 있었어.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어. 그리고 뭔가… 좀 달라.”
민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좀 달라’는 말로는 이 기이한 감각을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집 자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혹은 다른 차원의 존재가 깃든 것처럼 느껴졌다.
현상은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다.
어느 날 저녁, 민아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옆에 놓인 리모컨이 스르륵, 하고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누가 밀지도 않았는데.
“윽!”
민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거실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파바박, 하고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처럼. 형광등에서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천장의 조명등은 미친 듯이 명멸했다.
“이게 대체 뭐야!”
민아는 벌떡 일어났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싹함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때였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쿵! 하고 떨어졌다.
액자 속 그림은 찢어졌고,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리고 벽에는 붉은색 페인트로 쓴 듯한 기묘한 문자가 나타났다.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획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복잡한, 난생 처음 보는 형태의 언어였다. 마치 수많은 별이 얽혀 있는 성운을 추상화한 듯한 문양이었다.
벽 전체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붉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오묘한 빛이었다.
민아는 뒷걸음질 쳤다. 공포가 그녀의 심장을 짓눌렀다. 지금 당장 집을 나가야 했다. 아니,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빛 속에서, 글자들이 꿈틀거리는 듯하더니, 벽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수면 위로 번지는 물결처럼, 혹은 고요한 우주 공간에 떠도는 가스 구름처럼.
그 파동이 강해질수록, 희미한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낮은, 그리고 불쾌한 소리였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도 했고, 거대한 기계가 느리게 회전하는 듯도 했다.
민아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제발, 멈춰!”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한 문장이 마치 메아리처럼, 그리고 텔레파시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직접 박혔다.
_“우리의 신호가… 닿기를…”_
신호?
그 순간, 벽의 일렁임 속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회색과 검은색의 거대한 전함들이 끝없이 늘어선 함대였다. 별들이 점처럼 박힌 어둠 속에서, 수많은 행성들이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듯했다. 전함들은 어떤 거대한 구조물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구조물은 우주를 가로지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균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로 번들거렸다. 균열은 시공간을 찢는 듯했고, 그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존재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전쟁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규모의 전쟁. 별이 부서지고 은하가 뒤틀리는 대격변.
그 광경은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민아의 정신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벽은 다시 원래의 회색빛으로 돌아왔다. 붉은 글자들도, 빛도 모두 사라졌다.
액자의 유리 파편만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민아는 주저앉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벽을 만졌다. 차가운 석고보드의 질감만이 느껴졌다.
방금 본 것은 환상이었을까? 극심한 공포가 만들어낸 망상일까?
하지만 몸에 남은 전율은 너무나 생생했다.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박힌 목소리. _“우리의 신호가… 닿기를…”_
다시 침묵이 찾아온 아파트.
민아는 이제 안다.
이곳에서 벌어졌던 모든 기괴한 현상들은, 단순한 ‘귀신’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 그녀의 평범했던 삶의 공간이, 어쩌면 우주의 끝과 끝을 잇는 거대한 통신망의 한 지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의 아파트는, 미지의 존재가 발신하는, 절박한 구조 신호를 수신하는 안테나였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신호의 주파수가 잠시 그녀의 아파트를 통과하며 현실에 간섭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저 벽에 새겨졌던 글자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경고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메시지였을까?
민아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흩어진 액자 파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마치 부서진 별빛처럼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더 이상 평범한 도시의 직장인이 아니었다.
아니, 처음부터 평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의 삶은, 은하계 저편에서 온 미지의 메시지에 의해 영원히 바뀔 운명이었다.
민아는 어두워진 아파트 거실에서, 저 멀리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그 별들 중 어떤 별이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을까?
그리고 그녀는 그 신호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아무도 없는 아파트, 정적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민아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 넓은 우주에서 아주 작은 존재가 아님을 깨달았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연결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의 눈빛은 공포와 함께, 미지의 우주가 선사한 새로운 호기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아파트의 기이한 폴터가이스트는 멈췄지만, 우주의 메아리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