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천강상단의 밀실 살인**
적막이 깊은 밤, 묵직한 검은 그림자가 무영문의 장엄한 대청을 가로질렀다. 그림자의 주인은 무영문의 문주, 백여운이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냉철함을 잃고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멈춘 곳은, 무영문의 후원 가장 깊숙한 곳,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요 속에 잠긴 작은 서재 앞이었다.
“단우혁.”
백여운의 낮은 부름에도 서재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낡은 책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 그 안에는 먼지 가득한 서가들 사이, 아무렇게나 쌓인 책 더미에 파묻혀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기름때 묻은 도포, 며칠 밤낮을 잠들지 못한 듯 탁한 눈동자. 강호의 그 누구도 그에게서 무영문의 ‘서고의 현자’라는 칭호를 떠올리지 못할 터였다.
그의 이름은 단우혁. 무영문 내에서도 변방에 속한, 한낮 기인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러나 백여운은 알고 있었다. 강호의 그 어떤 절세고수도 풀지 못할 난제를, 이 사내의 기이한 머릿속은 풀어낼 수 있음을.
“밤이 깊었네. 자네가 그리 몰두하는 서책의 지혜가 혹 밤을 이기는 묘약을 주던가?” 백여운이 낮게 물었다.
단우혁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빛은 이내 백여운을 응시하며 희미한 빛을 찾았다.
“문주께서 직접 찾아오실 정도면, 필시 강호에 또다시 피바람이 불었거나, 혹은 그보다 더한 기이한 변고가 일어났음이 분명할 텐데요.”
단우혁의 말투는 어딘가 모르게 세속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의 지혜가 깊으면 깊을수록, 현실과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는 듯했다.
“변고라기엔… 실로 황당한 일이지.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아니, 자네만이 이 난제를 풀 수 있을 걸세.”
백여운의 목소리에는 드물게도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천강상단의 단주, 진만호가 살해당했네.”
단우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천강상단이라면 강호의 수많은 문파와 연을 맺고 있는 거대상단. 그 단주의 죽음은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상단 뒤에는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는 무림 세력들이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무영문의 인물들이 해결하지 못할 살인사건이라… 범인은 그림자처럼 사라지기라도 했습니까?” 단우혁이 팔짱을 끼며 서서히 흥미를 보이는 듯했다.
“그림자? 오히려 그림자보다 더 깊은 밀실에 갇혔지.” 백여운은 한숨을 쉬었다. “진만호는 어제 밤, 자신의 거처에서 변을 당했네. 방은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고, 창문은 쇠창살로 막혀있었으며, 외부 침입 흔적은 전무했지. 그 누구도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는 완벽한 밀실이었어. 그런데 그의 가슴팍에는 자신이 아끼던 비수가 깊숙이 박혀있었다네.”
단우혁의 흐릿했던 눈동자에 드디어 총기가 서렸다. “밀실 살인이라. 흥미롭군요.”
***
다음 날 새벽.
천강상단의 화려한 저택은 검은 장막이 드리운 듯 엄숙했다. 저택 곳곳에는 무영문의 제자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진만호의 죽음으로 인해 상단 전체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단우혁은 백여운과 함께 사건 현장인 진만호의 거처에 도착했다.
“문주님! 저곳입니다.”
문 앞을 지키던 무영문의 호위무사가 백여운을 발견하고 공손히 고했다. 그의 얼굴에는 밤샘 수사의 피곤함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좌절감이 역력했다.
단우혁은 무사의 인사는 건성으로 받으며 곧장 방으로 향했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지만, 그가 들어가기 전 잠시 멈춰 서서 문틀과 문고리를 유심히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특이점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어수선했지만, 살해 현장 특유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보다는 왠지 모를 정돈된 느낌이 강했다. 방 중앙에는 호화로운 침대 위에 진만호의 시신이 앙상하게 누워있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작고 날렵한 비수가 박혀 있었는데, 비수 손잡이에는 천강상단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건을 처음 발견한 자는 누구인가?” 단우혁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백여운이 답했다. “진만호의 개인 시종인 ‘연우’였다네. 아침 일찍 단주의 차를 가져다주기 위해 방문했다가, 문이 잠겨있자 이상함을 느끼고 사람들을 불러 문을 부수고 들어갔지.”
단우혁은 연우를 찾지 않고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먼저 침대에서 떨어져 있는 진만호의 발치를 살폈다. 맨발이었다. 침대 위에는 값비싼 비단 이불이 흐트러져 있었고, 진만호의 손은 억지로 쥐어진 듯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죽음의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시신의 주변을 맴돌며 시신의 옷자락, 침대보, 심지어는 바닥의 먼지까지도 놓치지 않고 훑었다. 무영문의 무사들은 이미 며칠 밤낮을 이 방에서 머리카락 하나라도 찾으려 애썼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단우혁의 눈은 달랐다. 그의 눈은 강호의 무인들이 쫓는 무공의 흔적이나 싸움의 흔적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논리의 틈새, 보이지 않는 그림자, 기만된 진실을 쫓았다.
“창문은 어떻습니까?” 단우혁이 침대 옆 벽에 달린 창문을 가리켰다.
무영문의 한 무사가 앞으로 나서며 설명했다. “창문은 외부에서 쇠창살로 굳게 막혀있고, 안쪽에서도 빗장으로 이중 잠금 되어 있었습니다. 쇠창살을 부수려면 엄청난 무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 어떤 흔적도 없었습니다. 또한 빗장도 파손된 흔적 없이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단우혁은 창문으로 다가가 손으로 창틀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창문 유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언가를 찾는 듯, 그러나 찾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 안에는 살해 흉기 외에 다른 무기가 있었습니까? 혹은 싸움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단주께서는 평소 호신용으로 허리에 비수를 차고 다니셨는데, 그것이 바로 시신에 박힌 비수입니다. 단주께서는 무공이 뛰어나신 분은 아니셨지만, 필사의 일격을 가할 정도의 내공은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그 어떤 방어의 흔적이나 싸운 흔적도 없었습니다. 마치 잠든 사이에 살해당한 것 같았습니다.” 무사의 목소리에는 답답함이 묻어났다.
단우혁은 무사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방 한편에 놓인 작은 서랍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몇몇 서책과 붓, 그리고 먹이 놓여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서랍장 위에 놓인 붓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보았다. 그리고는 그 옆에 놓인 먹통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시선이 다시 진만호의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의 손에 꽉 쥐어져 있는 주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영문의 무사들이 시신을 발견했을 때 이미 그 손은 그렇게 쥐어져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단주가 죽기 직전 무언가를 쥐려 했거나, 혹은 고통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쥐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단우혁은 고개를 숙여 진만호의 손을 더욱 가까이 살폈다. 굳게 닫힌 주먹 사이로 아주 미세한, 실오라기 같은 검은 조각이 끼어 있었다. 너무나도 작고 미미하여 눈여겨보지 않으면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그것은 마치… 숯 조각 같기도 했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단서. 밀실의 문은 굳게 닫혔지만, 단우혁의 머릿속에는 이미 하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문주님, 사건의 실마리를 찾은 듯합니다.” 단우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백여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무엇인가, 단우혁?”
단우혁은 미소만 지을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은 침대 옆 창문의 쇠창살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쇠창살 가장 윗부분에, 너무나도 작아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굳어버린 검은 얼룩 하나를 응시했다.
“밀실은… 깨졌습니다.” 그의 낮은 중얼거림이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