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틈새로 스미는 한기**
김민준은 노트북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다. 자정. 번화가에서 한 블록 떨어진 그의 원룸은 낮 동안의 소란스러움이 거짓말인 양 고요했다.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공간을 채웠다. 낡은 스탠드 조명이 노란빛을 뿜으며 그의 작업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지금 몰두해 있었다. 마감은 언제나 그를 숨통 죄듯 몰아붙였고, 영감은 늘 마지막 순간에야 찾아오는 법이었다.
커피가 식어가는 머그컵 옆으로 굴러다니던 연필 한 자루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처음엔 그저 탁자 위의 진동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민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연필을 바라봤다. 나무 연필은 마치 미끄럼틀을 타듯,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탁자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민준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연필을 빤히 쳐다봤다. 멈췄다. 그리고 곧 탁자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젠장.”
낮게 욕설을 읊조린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연필은 책상 의자 다리 옆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주워든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였나.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시간은 흐르고, 새벽 두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거의 다 끝냈다는 만족감에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코드 몇 줄만 더 정리하면, 오늘 밤은 드디어 자유다.
그때였다. 주방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뭐야?”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방으로 통하는 복도는 어두웠지만, 희미한 달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어렴풋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식탁 위는 깨끗했다. 설거지는 어제 해두었고, 먹다 남은 음식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소리였지?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발소리가 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스위치를 켜자 형광등이 요란하게 깜빡인 뒤 환하게 빛을 토해냈다.
주방 바닥에 머그컵 하나가 깨져 있었다. 그의 유일한, 아끼던 고양이 그림 머그컵이었다.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민준은 경악했다.
“이게 어떻게……?”
어제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그는 분명히 머그컵을 컵걸이에 걸어두었다. 그것도 가장 안쪽, 떨어질 위험이 없는 곳에. 그런데 지금은 바닥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 높은 곳에서 집어 던진 것처럼.
민준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도 잠겨 있었다. 외부인의 침입 흔적은 전혀 없었다.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피로 때문도, 환각 때문도 아니었다. 물리적인 현상이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깨진 조각들을 바라봤다. 유심히 살펴보니, 컵이 깨진 지점 주변 바닥에 아주 희미한 물기가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문질러보니, 그냥 물이 아니었다. 끈적임이 없고, 아주 차가웠다. 마치 얼음이 녹은 듯한 물방울들이었다. 그리고 묘하게도, 흙냄새가 났다. 축축한 흙, 그리고 희미한 쇠 비린내가 섞인 듯한 냄새.
“헛소리 마, 김민준.” 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지하에서 올라온 습기겠지. 오래된 아파트니까.”
애써 합리화하며 그는 깨진 컵을 치웠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날 이후, 기이한 일들은 일상이 되어갔다.
밤이 되면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보일러를 최대로 올려도 소용없었다. 마치 여름 한낮에 에어컨을 최저 온도로 틀어놓은 것 같은 냉기가 발목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그 차가운 기운과 함께 찾아오는 것이 있었다. 희미한 흙냄새.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막 길어 올린 흙처럼 축축하고, 동시에 어딘가 비릿한, 묘한 냄새였다.
전자제품들은 멋대로 오작동했다. 노트북은 갑자기 화면이 꺼지거나, 입력하지 않은 글자들이 저절로 타이핑되기도 했다. TV는 한밤중에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저절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고장이라고 생각해서 서비스 센터에 전화했지만, 기사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준은 밤마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무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그의 방인데, 더 이상 그의 공간이 아닌 것 같았다.
며칠 뒤, 그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그는 자신의 작업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닫고 나갔는데. 신경이 예민해진 민준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 위. 며칠 전 떨어졌던 그 연필이었다. 연필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스케치북에 글자를 쓰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연필을 쥐고 있는 것처럼, 연필심이 스케치북 위를 움직이며 희미한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돌…려…줘…’
획 하나하나가 희미했지만, 그 뜻은 분명했다. 민준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누, 누구야?”
말을 더듬으며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연필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것…’
그 순간,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한 찌릿한 고통이 민준을 덮쳤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귀에서는 굉음이 울렸다.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동시에 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을 뜨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연필은 다시 탁자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고, 스케치북에는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민준은 식은땀으로 축축한 몸을 떨었다. 환각이었을까? 하지만 온몸에 남아있는 찌릿한 통증은 너무나 선명했다.
그는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아파트에는, 이 방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평범한 삶을 조금씩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밤이 되자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불은 환하게 켜두었지만, 어둠은 더 이상 빛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탁자 위의 책들이 저절로 움직였다. 한 권, 두 권,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펄럭였다. 그러더니 가장 두꺼운 백과사전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와 바닥에 ‘퍽!’ 하고 떨어졌다.
민준은 공포에 질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낡은 창문 틈새로 ‘끼이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누군가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내…가…아니었어…’
‘…잊…지…마…’
중얼거림은 점점 커졌다. 마치 그의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지독한 한기가 밀려왔다. 이번에는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뼛속까지 시려오는 듯한 냉기였다. 콧속으로는 희미하게 느껴졌던 흙냄새와 쇠 비린내가 더욱 강렬하게 치고 올라왔다. 마치 무덤 속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생명 없는 비릿한 냄새였다.
민준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그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져… 제발….”
그때였다. 닫혀 있던 옷장 문이 삐걱거리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옷들이 흔들렸다. 옷장 안은 어두웠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어둠이 옷장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동자가 민준을 응시했다.
핏빛처럼 붉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증오와 슬픔이 뒤섞인 눈동자였다. 그것은 너무나 생생했고,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그 눈동자는 단순히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민준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이 마비된 듯했다. 그는 이불을 끌어안고 벌벌 떨었다.
그 붉은 눈동자가 옷장 문 틈새에서 점점 더 크게 뜨였다. 마치 그 존재 자체가 서서히 옷장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처럼.
‘…너…도…잊…었…더냐…’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더 이상 속삭임이 아니었다. 그의 뇌를 찢어발기는 듯한 섬뜩한 절규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 끝에, 민준은 선명하게 들었다.
낡은 탄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가슴을 꿰뚫는 총성.
그것은 이 아파트에서 들릴 수 없는, 오래되고 끔찍한 과거의 소리였다.
민준은 숨이 멎는 듯한 공포 속에서, 그 붉은 눈동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그저 기이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잊혀진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심연에서 기어 나온, 살아있는 절규였다.
그리고 그 절규는, 이제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