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고요하고 깊은 우주, 무한의 암흑 속을 떠도는 은백색의 점 하나. 인류의 가장 깊은 욕망과 두려움을 품고 별과 별 사이를 유영하는 탐사선, ‘카시오페이아 호’였다. 선장은 이선우, 수십 년의 항해 경력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우주의 경이로움과 싸늘함에 겸허히 고개를 숙이는 남자였다. 그의 곁에는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호기심이 공존하는 수석 과학자 김민아, 노련한 손길로 모든 기계의 심장을 어루만지는 기관장 박준혁, 그리고 별자리 지도를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젊은 항해사 최은지가 있었다.

수십 년 항해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그들은 우주가 언제든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던져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수는 대개 재앙의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함장님, 뭔가 감지됩니다.”

최은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잠에 빠져들었던 이선우는 눈을 번쩍 떴다. 메인 스크린에 희미한 잔상이 떠올랐다.

“이게 뭔가? 소행성인가?”

박준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콘솔 위의 버튼을 훑었다.

“아뇨, 중력 이상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천체와는 달라요. 크기가 불규칙하고… 자전 주기가 비정상적입니다.” 최은지가 데이터를 띄웠다.

김민아의 눈이 빛났다. 과학자 특유의 광기 어린 집착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에너지 패턴을 분석해봐, 은지 씨. 혹시 인공물일 가능성은?”

“인공물이요? 이 깊은 우주에서요?” 박준혁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인류의 손길이 닿은 가장 먼 곳을 이미 한참 지나왔다.

“가능성이 있다면, 확인해야죠.” 이선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흥미와 경계심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카시오페이아 호, 속도 낮추고 접근한다. 모든 시스템 점검, 비상 대비 태세.”

탐사선은 조심스럽게 미지의 중력원으로 향했다. 스크린 속 잔상은 점점 선명해졌다. 그것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소행성도, 혜성도 아니었다. 완벽하게 검은색의 거대한 육면체였다. 마치 우주 자체를 찢어 만든 상자 같았다. 빛을 흡수하는 듯, 주변의 별빛조차 왜곡시키는 기묘한 존재감이었다.

“말도 안 돼….” 김민아가 숨을 들이켰다. “이런 물질은 이론적으로만 존재 가능해요. 주변 공간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블랙홀의 표면 같은 건가?”

“물질 표면에 미세한 파동이 감지됩니다.” 최은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숨을 쉬는 것 같아요.”

이선우는 망원경을 통해 육면체를 직접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빛 한 점 반사하지 않는 절대적인 어둠이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검은 육면체의 면들이 뒤틀리는 듯한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착각일까?

“근접 탐사 드론을 보내.” 이선우가 지시했다. “안전거리 유지하고, 모든 센서 활성화.”

드론이 발사되었다. 메인 스크린에는 드론이 전송하는 실시간 영상이 떴다. 육면체는 거대했다. 길이가 수십 킬로미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표면은 매끄러웠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미세한 문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그림이라기보다는, 물질 자체에 새겨진 회로 같기도 했고, 어떤 기하학적인 언어 같기도 했다.

갑자기 드론의 영상이 지지직거렸다.

“통신이 불안정합니다!” 최은지가 외쳤다. “뭔가… 전파를 방해해요.”

“드론 제어를 복구해, 은지 씨!” 이선우가 명령했다.

하지만 드론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면체의 표면을 훑던 드론이,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 듯 육면체로 돌진했다. 콰앙! 스크린은 백색 잡음으로 가득 찼다.

“드론 손실! 육면체에 충돌했습니다!” 최은지가 경악했다.

“젠장, 이게 무슨…!” 박준혁이 욕설을 내뱉었다.

카시오페이아 호 안의 조명이 일순 깜빡였다. 시스템 경고음이 울렸다.

“함장님, 선체 전반에 걸쳐 미세한 에너지 서지가 감지됩니다! 원인 불명!” 박준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선우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드론이 사라진 것보다, 그 뒤에 일어난 현상이 더욱 섬뜩했다.

“육면체에서… 뭔가 나오고 있어요!” 김민아가 스크린을 가리켰다.

육면체의 표면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서서히 응집되더니, 수많은 작은 점들로 분리되어 카시오페이아 호를 향해 날아왔다.

“방어막 올려! 뭐든, 막아내!” 이선우가 소리쳤다.

하지만 방어막은 무용지물이었다. 검은 점들은 마치 유령처럼 방어막을 통과하여 카시오페이아 호의 선체로 스며들었다. 선체에 닿는 순간, 작은 스파크가 튀었고, 선내의 전등이 다시 한번 깜빡였다.

“시스템 이상! 전력 불안정! 보조 발전기 가동!” 박준혁이 안간힘을 썼다.

그때였다. 최은지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그녀의 눈이 텅 비어 있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은지 씨! 무슨 일이야?” 이선우가 그녀를 불렀다.

최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낮고 웅얼거리는 소리였다. 마치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 언어를 읊조리는 듯했다.

김민아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은지 씨! 정신 차려요!”

하지만 최은지는 김민아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마치 홀린 듯 메인 콘솔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콘솔을 조작했다.

“정지해, 은지 씨! 뭘 하는 거야!” 박준혁이 그녀를 제지하려 했지만, 최은지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빨랐다.

메인 스크린의 영상이 육면체에서 벗어나 우주의 저편을 향했다. 광대한 성운, 미지의 은하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갑자기, 스크린에 낯선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깜빡였다. 기하학적인 도형, 알 수 없는 생명체들, 거대한 도시의 폐허… 인류의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풍경들이었다.

이선우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건… 기억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아뇨… 저건… 정보예요!” 김민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은지 씨가… 저 육면체에서 뭔가 다운로드 받고 있어요! 아니, 육면체가 은지 씨를 통해 우리 함선 시스템에 접속하고 있습니다!”

“막아! 당장 통신을 끊어!” 이선우가 명령했다.

“안 돼요, 함장님! 제어권이 없습니다! 마치… 함선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요!” 박준혁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스크린 속 이미지들은 점점 더 빠르고 혼란스러워졌다. 그와 동시에 카시오페이아 호의 선체 곳곳에서 기묘한 공명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함선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악기가 되어 연주되는 듯했다.

최은지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눈물 같았지만, 분명히 검은색이었다. 그녀는 쓰러졌다. 메인 스크린은 다시 육면체를 비추고 있었다. 육면체의 표면은 이제 미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가 더욱 짙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은지 씨!” 김민아가 최은지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숨은 얕고 불안정했다.

“함장님, 외부 센서 이상! 함선 주변의 공간 구조가… 변형되고 있습니다!” 박준혁이 경악했다.

카시오페이아 호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우주의 별들이 일렁였다. 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우주를 거대한 천 조각처럼 구기고 펼치는 것 같았다.

이선우는 육면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섬뜩한 깨달음이 번개처럼 스쳤다. 저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존재의 기억 저장소이거나, 혹은 더 나아가, 우주를 조작하는 열쇠였다. 그리고 그들이 방금 그 열쇠를 건드린 것이었다.

“전원 차단! 비상 동력으로 전환! 엔진 최대 출력으로 이탈!” 이선우가 절규하듯 외쳤다. “당장 여기를 벗어나야 해!”

“이미 늦었습니다, 함장님….” 박준혁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가득했다. “함선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엔진이… 먹통이 됐어요.”

카시오페이아 호는 거대한 육면체에 완전히 붙잡힌 채였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얽매이는 기분이었다. 육면체의 검은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던 안개가 점차 짙어지더니, 카시오페이아 호를 감싸기 시작했다. 선체가 검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선우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희미한 별빛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의 우주선은 이제 더 이상 ‘탐사선’이 아니었다. 미지의 심연 속으로 끌려가는 표류선일 뿐이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지?” 김민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은지를 안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이선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스크린에 마지막으로 잡힌 육면체의 심장이 보였다. 그 심장은 이제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문이 열리는 듯했다. 미지의 차원으로 통하는, 혹은 파멸로 이끄는 문이.

그리고 카시오페이아 호는 그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들이 탐사하려 했던 심우주는 이제 그들을 삼키는 거대한 입이 되었다. 인류의 운명이, 아니 그들의 운명이 이 미지의 유물을 발견한 순간부터 이미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끝없는 어둠 속으로, 새로운 종류의 생존을 향해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