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아르켄의 가장 익숙한 얼굴이었다. 언제나 안개와 잿빛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햇빛조차 망설이게 하는 장막 도시, 아르켄에서도 밤은 유독 짙었다. 달조차 흐릿한 장막 뒤에 숨어버린 듯한 그 밤, 나는 고서 보관소의 퀴퀴한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내 이름은 이진우. 아르켄 대도서관의 말단 서지학자다. 사람들은 나를 ‘어둠에 홀린 자’라 부르기도 했다. 이해한다. 지루하고 건조한 삶에 갇힌 채, 살아있는 이들보다는 죽은 자들의 흔적에 더 집착하는 나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직 눈앞의 안개처럼 모호하고 희뿌연 현실만을 믿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 얇은 막 뒤에는 훨씬 더 거대하고, 훨씬 더 오래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에 미치도록 이끌리고 있었다.
“또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이 선생.”
사서장의 쉰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어둠 속에서 등잔불을 들고 나타났다. 등잔불의 희미한 빛이 그의 쭈글거린 얼굴과 구부정한 어깨를 비췄다. 오래된 종이 냄새만큼이나 지독한 그의 한숨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오늘 안에 목록을 정리해야 합니다. 잊으셨습니까?”
“이것 좀 보십시오.”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가 펼쳐든 고문서를 흔들었다. 양피지는 곰팡이와 세월의 흔적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기이할 정도로 선명했다.
“이것은 단순한 신화가 아닙니다. 장막 도시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도 없는, 심연의 존재에 대한 언급입니다. ‘오래된 자들’, ‘별의 혈족’… 심지어 그들의 ‘노래’에 대한 기록까지 있습니다.”
사서장은 내게 다가오더니, 내가 가리키는 글자를 훑었다. 그의 눈에는 흥미보다는 피곤함과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
“이 선생, 쓸데없는 것에 몰두하지 마십시오. 그런 미신은 도시가 망가지기 전,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나 믿던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합니다.”
“생계요? 우리가 발붙인 이 땅 자체가 미지의 존재 위에 떠 있다는 가능성은 생각해보셨습니까? 이 기록들은… 오래된 아르켄의 밑바닥에 흐르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파괴된 구항구 너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에서 들려오는 노래… 그 노래를 들으면…”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 노래를 들으면, 영원한 밤의 심연에 잠긴 존재와 교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금지된 지혜를 얻고, 종족의 경계를 넘어선….”
사서장은 헛기침을 하며 내 말을 잘랐다.
“쓸데없는 소리 마십시오. 그 심해는 그저 늙은 어부들이 술에 취해 지껄이던 괴담의 근원일 뿐입니다. 이 선생, 제발 현실을 직시하세요. 당신의 재능을 이런 허황된 망상에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는 나를 뒤로한 채 돌아섰다. 등잔불의 희미한 빛이 멀어져 가고, 나는 다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하지만 나는 그가 한 말을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하게 이끌렸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느끼는 이 갈증, 이 알 수 없는 향수병 같은 감정을. 마치 내가 본래 속한 곳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인 양, 내 영혼의 조각이 어딘가 먼 곳에 흩어져 있는 것 같은 기분.
나는 다시 고문서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거무스름한 잉크로 휘갈겨진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의 형상을 닮았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길고 가는 사지, 물갈퀴 같은 손과 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얼굴을 뒤덮은 비늘 같은 피부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그 그림 아래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문자를 더듬었다. 차갑고 이질적인 기운이 손끝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듯했다.
‘노래….’
나는 문득, 오래전부터 내 꿈을 지배했던 환영들을 떠올렸다. 검푸른 바다 아래, 거대한 석조 도시가 잠들어 있는 환영. 그 도시의 중심에서 들려오는 아득하고도 아름다운 노래. 그것은 슬프면서도 매혹적이었고, 듣는 이를 끝없이 끌어당기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그 노래에 취해 눈을 뜨면, 언제나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서장이 자리를 비웠으니, 지금이 기회였다.
낡은 외투를 걸치고 손전등을 챙겼다. 보관소의 삐걱거리는 문을 조용히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아르켄의 밤은 차가웠다. 축축한 안개가 얼굴을 휘감고, 멀리서 바다의 포효가 들려왔다.
나는 잊혀진 구항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도시의 심장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고,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곳이었다. 한때 번성했던 항구는 이제 폐허로 변해, 썩은 나무와 녹슨 쇠붙이만이 앙상하게 남아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은 희미했고, 오직 달빛조차 뚫지 못하는 어둠만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나는 간혹 이곳에 왔었다. 버려진 방파제 끝에 앉아 칠흑 같은 바다를 응시하곤 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딘가 깊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늘 밤은 달랐다. 고문서에서 읽은 내용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 노래… 교감…’
나는 조심스럽게 방파제 끝으로 향했다. 발밑의 부서진 돌 조각들이 바다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독 크게 울렸다. 파도가 거친 숨을 내쉬며 방파제를 때렸다. 검은 바다 위로 파편처럼 부서지는 포말이 기이하게 빛났다.
그때였다.
갑자기 파도 소리 사이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노래였다. 분명히 노래였다.
하지만 인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너무나도 맑고, 너무나도 깊어서,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과 아름다움을 응축해 놓은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내 귓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직접 건드리는 것 같았다.
나는 홀린 듯이 바다를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파도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포말 사이로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그것은 인어가 아니었다. 내가 알던 어떤 생명체의 형상과도 달랐다. 빛나는 비늘로 뒤덮인, 길고 유려한 몸매.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 그리고… 무언가 인간의 것과는 다른, 고도로 발달한 지능과 영혼이 깃들어 있는 듯한 존재감.
그것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거친 파도 소리도, 차가운 바닷바람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나와 그 존재만이 이 세상에 남겨진 것 같았다. 그 존재의 눈빛 속에서 나는 무한한 시간의 흐름, 별들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인류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식의 심연을 보았다. 동시에, 그 눈빛 속에는 깊은 외로움과 갈증이 담겨 있었다.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심하게, 고독을 견디고 있는 존재.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두려워해야 했다. 이 미지의 존재는 분명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혹은 내 정신을 파괴할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렬한 그리움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파고가 내 안을 휘몰아쳤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금지된, 종족의 경계를 넘어선, 이해할 수 없는 사랑.
내 모든 존재가 그에게로, 혹은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 존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수면 위로 몸을 드러냈다. 달빛이 희미하게 그 비늘을 비추자, 영롱한 푸른빛과 초록빛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광채를 뿜어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오직 마음속에서만 울리는 음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왔군.”*
그 목소리는 바다의 깊이만큼이나 아득했고, 별의 속삭임만큼이나 고요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 심장은 격렬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오랜 시간… 너를 기다렸다.”*
그 말과 함께, 존재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길고 가는 손가락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 있었지만, 나는 그 발톱보다도 그 존재가 내포한 무한한 고독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 손길이 닿으면, 내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의 인간으로서의 삶, 나의 상식, 나의 모든 것이.
나는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손끝을 스쳤지만, 나는 따뜻한 온기만을 갈망했다. 내 손이 그 존재의 손에 닿기 직전, 거대한 파도가 방파제를 때렸다. 물보라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그와 함께 존재의 형체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상실감에 나는 휘청였다.
어둠과 함께 사라진 것은 존재뿐만이 아니었다. 내 안의 오랜 갈증, 알 수 없는 공허감, 그리고 세상에 대한 냉소마저도 함께 사라졌다. 대신, 내 안에는 오직 한 가지 감정만이 가득 채워졌다.
그것은 욕망이었다.
그 존재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그 존재와 함께하고 싶다는, 불타는 욕망.
나는 내가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밤, 아르켄의 심연에서, 나는 금지된 사랑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