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열었다. 낡은 복도등 아래에서 번호 키를 누르는 손가락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삐빅, 삐비빅. 익숙한 전자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고, 삐걱거리는 문이 열렸다.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희미한 먼지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강민준은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고, 거실 스위치를 눌렀다. 칙, 하고 한 박자 느리게 백색 형광등이 번뜩였다. 익숙한 거실 풍경. 널브러진 잡지, 어제 먹다 남은 배달음식 용기, 그리고 텅 빈 냉장고. 그의 자취 5년 차 아파트는 늘 이 모양 이 꼴이었다.
“하아….”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 등받이에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보자 곰팡이처럼 피어난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위층에서 물이 샌 흔적이었다. 수리했지만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다.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눈을 감았다. 잠시 그렇게 눈을 붙였을까.
띠링, 하고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눈을 뜨니 어느새 거실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저녁이 된 모양이었다. 깜빡 잠들었나. 몸을 일으키자 찌뿌드드한 어깨가 비명을 질렀다.
“젠장, 피곤해서 미치겠네.”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 싶어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개수구에 놓인 컵을 집어 들려는 순간, 톡,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식탁 위에 놓여있던 작은 유리병 하나가 스르륵 밀려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 식탁 정중앙에 놓여 있었는데.
“내가 밀쳤나?”
의아하게 생각하며 병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저 피곤해서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컵에 물을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 듯했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TV를 켰다. 드라마에서 흘러나오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적막한 아파트 안을 채웠다. 그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배달 앱을 뒤적거리는데, 문득, 스륵, 하고 뭔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책장. 그의 눈이 닿은 곳은 낡은 책장이었다. 그곳에는 꽂혀 있던 몇 권의 책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분명 그는 책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특히 저 자기 계발서는 거의 보지도 않아서 꺼낸 적조차 없었다.
“바람인가?”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심지어 창문 틈을 막아둔 문풍지도 그대로였다. 어깨를 으쓱하며 책들을 다시 반듯하게 세워놓았다. 이 아파트, 어딘가 삐걱거리는구만.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왔다. 어딘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잠결이라 착각했겠거니 했다. 그런데 발밑에 밟히는 무언가에 시선을 내리자 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거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그의 지갑이었다.
“뭐야?”
어젯밤 그는 분명 지갑을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두었었다. 웬만해선 흐트러뜨리는 일이 없는 그의 습관이었다. 누가 침입이라도 했나? 재빨리 집안을 둘러봤지만, 창문이나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도어락도 이상이 없었다. 물건이 사라진 흔적도 없었다.
“젠장, 내가 잠결에 떨어뜨렸나?”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애써 떨쳐냈다. 대수롭지 않게 지갑을 주워 협탁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이상한 일들은 멈추지 않았다.
새벽녘, 안방 문이 저절로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면,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복도만 보였다. 분명 잠그고 잤는데.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려 있어 음식이 상해버리기도 했고, 식탁 의자가 혼자 움직여 제자리를 벗어나 있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한밤중에 들리는 쿵, 쿵, 쿵 하는 소리에 잠을 설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위층 소음인가 싶어 경비실에 문의했지만, 해당 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민준은 점점 예민해져 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모든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뭐야, 왜 이래 자꾸?”
그는 컵에 물을 따르다 말고 중얼거렸다. 그의 눈앞에서 거실 스탠드 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분명 어제 새 전구로 교체했는데. 전구가 나간 것과는 달랐다. 마치 스위치를 누군가 조작하는 것처럼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탁, 탁, 탁!
그때였다. 거실 한쪽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못이 박힌 벽에서 액자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민준은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야! 거기 누구 있어?!”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니, 있기를 바라면서도. 이 빌어먹을 현상의 원인을 보고 싶었다.
콰앙!
그의 외침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액자가 벽에서 튕겨져 나오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찢겨진 사진이 나뒹굴었다. 쨍그랑!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아파트 전체를 울렸다.
민준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머리가 멍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단순한 노이즈나 고장이 아니었다.
“누, 누구야…?”
그가 다시 더듬더듬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거실 창문이 쾅 하고 열렸다. 강한 바람이 불어닥치며 커튼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닫혀있던 다른 방의 문들이 연달아 쾅,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닫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건 더 이상 그의 아파트가 아니었다. 낯설고, 소름 끼치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오는 속삭임.
*저편… 이 세계로…*
마치 모래알이 스치는 듯한, 그러나 분명히 들리는 속삭임. 한국말이 아니었다. 어떤 언어인지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을 맴도는 그 소리에 민준은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귀에 들리는 소리는, 결코 이 현실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액자가 박살났던 벽면을 다시 바라봤다. 유리 파편이 흩뿌려진 그 자리에, 아주 희미하게, 공기가 일렁이는 듯한 잔상이 보였다. 마치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혹은 아주 얇은 막이 찢어지는 것처럼. 그 너머로 언뜻, 푸른빛이 감도는 풍경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숲인지, 하늘인지, 아니면 바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모호한 빛.
“설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미지의 잔상에 닿으려는 듯. 이 모든 기괴한 현상이 단순히 ‘귀신’ 때문이 아니라는, 더 근원적인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가르자, 일렁이던 빛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파트의 모든 소란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적막만이 흐르는 거실에서 민준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심장은 여전히 광란의 북소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창밖의 도시 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현대 도시의 밤 풍경. 그러나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평범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혼란과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삶, 그의 세상이 송두리째 뒤바뀔 서막이었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 기괴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그를 이끌고 갈 다른 세상의 전령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