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미스터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축축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얇은 이불을 뚫고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정우는 눈을 떴다. 창문 너머는 잿빛 하늘이 전부였다. 빌딩 숲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회색빛 시야를 가로막았다. 도시의 소음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이 작은 방 안은 거대한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킨 듯 고요했다.

세탁되지 않은 옷가지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고, 컵라면 용기는 며칠째 그대로 방치되어 굳어버린 면발을 드러내고 있었다. 눅진한 공기 속에서 정우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작은 협탁에는 며칠 전부터 같은 페이지를 펼쳐둔 채 놓여 있는 낡은 책 한 권이 있었다. 책 위에 놓인 안경을 집어 들었지만, 굳이 쓸 필요는 없었다. 그 글자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의 그 기억이 다시 뇌리를 스쳤다. 아니, 매일 밤 찾아오는 악몽이었고, 매일 아침 깨어나면 현실이 되는 저주였다.
‘정우야, 우린 꼭 성공할 거야. 그리고 그 성공의 가장 높은 곳에 네 이름이 새겨질 거야.’
그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늘 웃는 낯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포부 가득한 목소리로. 믿었다. 바보같이, 진심으로. 그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정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유리창에 손바닥을 짚었다. 희뿌연 유리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여전히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 그 녀석은 지금쯤 화려한 조명 아래서 모두의 찬사를 받고 있겠지. 제 이름 대신 그 녀석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힌 간판이 도시의 밤을 밝히고 있겠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쓴맛은 비단 커피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아니 어쩌면 인생 전체를 통틀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정우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발버둥 쳐봐도 소용없었다. 이미 완벽하게 짜인 판 위에 놓인 무력한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니까.

손안에 쥐고 있던 낡은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번호가 떠 있었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경박하리만큼 활기찼다.
“정우 씨? 오랜만입니다. 혹시 뉴스 보셨어요? 현수 대표님, 이번에 아주 제대로 터트렸던데요! 역시 천재는 다르다고 해야 하나?”
정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폰이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그래서요?”
“아니, 뭐 별건 아니고… 그냥 문득 정우 씨 생각이 나서요. 옛날에 두 분이 같이 일하시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는데 말이죠. 아깝다, 아까워.”
‘아깝다’는 단어가 비수처럼 가슴을 꿰뚫었다. 그들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가십거리였을 뿐이었다. 한때 잘나가던 두 친구의 비극적인 결말. 그리고 그 비극의 유일한 생존자는, 모든 것을 빼앗아간 승리자였다.

정우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볼 일 없으면 끊겠습니다.”
“어? 아, 예예. 뭐… 몸 건강히 잘 지내세요. 현수 대표님도 정우 씨 안부를 가끔 물어보시던데.”
그 말에 정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부? 아니, 비웃음이었겠지. 나락으로 떨어진 친구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일 테다. 그 웃음 속에는 어떤 따뜻함도, 연민도 없었다. 오직 잔인한 조롱만이 가득했으리라.

전화를 끊자마자 정우는 휴대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화면이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 박힌 유리 파편들이 섬뜩하게 빛났다. 파괴의 충동이 온몸을 휘감았다. 손톱으로 긁어대는 듯한 고통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때였다.
창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이내 거세지며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킬 듯 쏟아져 내렸다. 정우는 그 빗소리 속에서 제 심장 소리를 들었다. 차가운 심장이,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리듬으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방 한가운데를 응시했다. 무너진 자존심, 짓밟힌 꿈, 그리고 산산조각 난 믿음. 모든 것이 그의 발치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 파편들 속에서, 아주 작지만 선명한 불꽃 하나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비참해할 시간은 없었다.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좌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 녀석은 분명, 제가 이렇게 무너져 내리기를 바랐을 테다. 완전히 부서져 먼지처럼 사라지기를.

정우는 부서진 폰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폰은 이제 제 기능을 상실했지만, 그 파편들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빛나고 있었다.

“현수야.”

입 밖으로 나온 이름은 차갑고도 건조했다. 그 속에는 애증도, 미련도 없었다. 오직 하나의 감정만이 또렷하게 응축되어 있었다.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네 손으로 무너뜨리게 해줄게.”

방 안의 공기는 더 이상 눅진하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심장 속에서, 얼음 같은 결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창밖의 풍경이 마치 그의 눈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우의 눈은 이미 그 어떤 눈물도 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지독하게 차가운, 지독하게 비어 있는 눈만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았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수였다.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자의, 지옥에서 온 처절한 복수극.
이제, 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