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삭막한 콘크리트 숲 한가운데, 고층 아파트 13층. 김민준은 그곳, 제법 볕이 잘 들고 깔끔한 새 아파트에서 며칠째 잠을 설쳤다. 이유 모를 미세한 소음 때문이었다. 처음엔 위층 아이들의 발소리겠거니 했다. 아니면 오래된 건물의 배관에서 나는 소리쯤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지고 기이해졌다.
툭. 툭.
어느 날은 분명히 침대 머리맡 벽에서 손가락으로 툭툭 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민준은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 출근 준비를 위해 칫솔을 들려는 순간, 칫솔꽂이에 꽂혀있던 다른 칫솔이 스르륵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마치 누군가 건드린 것처럼. 민준은 피곤함에 눈을 비비며 “내가 너무 예민한가” 하고 중얼거렸다.
그날 저녁, 민준은 늦은 퇴근 후 컵라면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려 했다. 뜨거운 물을 붓고 뚜껑을 닫아두었는데,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젓가락이 컵라면 옆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히 컵라면 뚜껑 위에 올려두었던 젓가락이었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 하고 떨어졌다.
“뭐야…?”
그때부터였다. 눈에 띄는 현상들이 시작된 것은.
자고 일어나면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물컵이 싱크대에 옮겨져 있거나, 서랍이 살짝 열려있는 일이 잦아졌다. 민준은 처음엔 스스로의 건망증을 탓했다. 하지만 어느 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주방 식탁에 놓여있던 빈 물병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마치 누군가 힘껏 밀친 것처럼.
민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갔다. 깨진 유리 파편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바람이 불 만한 여지도 없었다. 그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보세요? 누가… 누가 장난치는 거예요?”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대답도, 인기척도 없었다. 단지 그의 심장 소리만이 귓가에 크게 울릴 뿐이었다. 그날 밤, 그는 거실 소파에서 웅크리고 앉아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민준은 용기를 내어 친구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현우야. 너 혹시… 귀신 같은 거 믿냐?”
수화기 너머로 현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웬 헛소리야? 너 요즘 야근에 시달려서 헛것 보냐?”
민준은 현우에게 최근 겪었던 일들을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물건이 저절로 움직이고,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 현우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들었지만, 민준의 진심으로 겁먹은 목소리에 점차 장난기가 사라졌다.
“음… 정말이야? 네가 그 정도로 무서워할 정도면 심각하네. 혹시 건물이 오래돼서 그런 거 아니야? 아파트 관리실에 문의라도 해봐.”
“새 아파트야! 그리고 이건 그냥 노후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미치겠어, 현우야.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알았어, 알았어. 일단 진정하고. 내가 주말에 네 집에 가서 하룻밤 같이 있어줄게. 그래도 안 되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현우가 오기로 한 주말까지, 민준은 집을 나설 때마다 현관문을 두세 번씩 잠갔고, 잠자리에 들 때는 거실의 작은 스탠드라도 켜놓았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항상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섬뜩한 느낌.
그리고 현우가 오기로 한 금요일 밤이었다.
민준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 애썼다. 여전히 주위는 조용했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딸깍, 딸깍, 딸깍.
침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얼어붙었다. 현관문은 분명히 잠갔고, 현우는 아직 오지 않았다. 문고리는 누군가 안에서 잡아 돌리는 것처럼, 집요하게 소리를 냈다.
민준은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아주 조금,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어둠 사이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얼핏 스치는 듯했다.
“누구… 누구세요?”
민준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비명을 억누르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방문은 더 이상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고 그 상태로 멈춰 있었다. 민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켰다. 강렬한 빛이 문틈으로 향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어둠뿐. 민준은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천천히 닫았다. 문고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문을 잠그고 침대로 돌아온 민준은 얇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날 밤, 이불 속에서 그는 선명하게 들었다.
‘툭, 툭.’
이번엔 침대 바로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마치 침대 밑에 누군가 숨어 민준의 침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것처럼.
다음날 아침, 민준은 현우에게 전화도 하지 않고 무작정 짐을 쌌다. 회사에 병가를 내고 급하게 집을 나섰다. 현우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지만, 민준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단지 “나… 나 더 이상 거기 못 있겠어.”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민준은 현우의 집으로 피신했다. 며칠간 그곳에서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이미 그의 정신은 피폐해져 있었다. 잠들기 직전, 그는 항상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고, 발밑에서 툭, 툭거리는 환청에 시달렸다.
일주일 후, 현우와 민준은 다시 민준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현우는 민준의 짐을 마저 가져오기 위해서라도 한번은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불안에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싸늘한 침묵이었다.
집 안은 깨끗했다. 모든 것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봐, 별거 아니잖아? 네가 너무 예민했거나, 피곤해서 겪은 해프닝일지도 몰라.”
현우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준은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집 안을 살폈다. 그때, 그의 시선이 거실 벽에 멈췄다.
하얀 벽지 위에, 붉은색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마치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쓴 것처럼 희미하지만, 분명히 식별 가능한 글자였다.
‘가지 마.’
현우는 그 글자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벽에 쓴 글씨는 마치 피로 쓴 것처럼 붉고 섬뜩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글씨가 너무나도 생생하고, 너무나도 불길했기에, 더 이상 아무런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가… 가자.” 현우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더 이상 서 있지도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현관문을 채 닫기도 전에, 안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현관문을 안에서 거칠게 닫아 버린 것처럼.
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아파트를 뛰쳐나왔다.
그 뒤로 민준은 그 아파트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삿짐도 포기하고, 그가 살던 아파트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가끔 현우가 그 아파트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마다, 민준은 핏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그 집은 지금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도시의 수많은 고층 아파트 중 하나로, 겉보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누군가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가지 마’라는 말을 속삭이며.
